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기업 차원에서 운영되던 인공지능(AI)은 주로 리스크 관리, 소프트웨어(SW) 개발, 고객 서비스 등 효율성을 높이고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한 용도로 활용되어 왔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실제 사람과 소통할 수 없다'는 불만을 유발하는 불편한 존재였으며, 프로그래밍과 콘텐츠 제작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AI가 인간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협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AI는 '불편하고 위협적인 존재'에서 벗어나 시간, 반복 노동, 비용을 절감하는 핵심 기술로 평가받고 있다. AI는 소비자의 일상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어 소비자 행동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 동시에 유통업체와 마켓플레이스, 제조업체에서도 새로운 기술 환경에 맞춰 상품과 서비스 제공 방식을 구조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AI는 추천, 분석, 자동화에 이르기까지 산업과 분야를 막론하고 비즈니스 운영 방식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으며, 점차 더 복잡한 판단과 실행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는 소비자와 기업 간의 상호작용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확산되고 있는 '에이전틱 AI(Agentic AI)'는 AI 기술의 진화가 새로운 국면에 진입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질문에 답하고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도록 훈련된 기존 AI와는 달리, 사용자 지시를 기반으로 실질적인 작업을 수행하며 다른 시스템 및 AI에이전트와 상호작용함으로써 복합적인 업무 수행이 가능하다. 정해진 규칙이나 고정된 입력에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환경과 문맥을 스스로 분석해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 핵심 차별점이다.
이러한 AI 기술의 발전은 이제 단순한 고객 경험 개선을 넘어, 커머스 생태계 전체를 구조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소비자들이 효율적인 온·오프라인 쇼핑 경험을 위해 AI를 활용하고 있다. 어도비(Adobe)의 최근 조사결과 에 따르면, 지난해 연말 쇼핑 시즌(2024년 11월 1일~12월 31일) 동안 생성형 AI를 통한 미국 온라인 쇼핑몰 유입 트래픽은 전년 동기 대비 1300% 증가했다. 이후에도 이 같은 추세가 이어져, 2025년 2월에는 7개월 만에 1200% 증가한 수치를 기록했다. AI를 활용한 쇼핑 경험에 대한 소비자 만족도 역시 높다. 이용 경험이 있는 응답자 중 92%는 “AI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와 비교해 더 나은 쇼핑 경험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AI가 소비자와 판매자의 행동 방식을 이미 변화시키고 있으며, 그 영향력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임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 앞으로는 소비자 개인을 대리하는 에이전트가 제품 검색과 비교는 물론, 구매 결정, 결제, 이후 거래 관리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수행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예컨대 사용자가 해외여행을 계획 중이라면, AI 에이전트는 사용자의 예산과 취향을 분석해 최적의 옵션을 도출하고, 항공권·숙박·레저활동의 예약 및 결제까지 독립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기존에는 사용자가 개별 앱에 일일이 접속해 정보를 탐색하고 비교 후 구매 결정을 내려야 했다면, 이제는 신뢰를 기반으로 AI에 그 과정을 완전히 위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AI가 결제 능력을 갖추게 되면서 판매자, 소비자, 제조업체 모두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소비자 경험뿐 아니라, 판매자의 비즈니스 운영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에이전틱 AI를 통해 판매자는 국경을 넘어 글로벌 고객과 안전하게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국내 판매자들도 복잡한 현지화 과정이나 인프라 없이 해외 소비자와의 접점을 확대하고, 직접 해외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모든 가능성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신뢰'의 확보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AI가 사람 대신 구매 결정을 내리고 결제를 실행하는 구조가 확산되기 위해서는 소비자는 물론 금융기관과 판매자 모두로부터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소비자는 개인정보와 결제 권한을 AI에 위임하는 과정에서, 해당 AI가 신뢰할 수 있는 주체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 직면하게 된다. 금융기관도 마찬가지다. '이 요청이 실제 고객에 의해 승인된 것인가?'라는 인증 이슈는 향후 가장 민감한 지점이 될 것이다. 판매자 입장에서는 '이 거래가 위조되지 않았는가', '결제 사기의 가능성은 없는가'라는 실질적 리스크를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응해, 비자는 올해 글로벌 상품 발표 행사에서 '비자 인텔리전트 커머스(Visa Intelligent Commerce)'라는 새로운 솔루션을 발표했다. AI 에이전트를 설계하는 개발자에게 비자의 글로벌 결제 네트워크와 인증 기술을 개방함으로써, AI 커머스에 최적화된 안전하고 유연한 결제 환경을 제공한다는 방침이다. 비자는 지난 30년간 AI와 머신러닝을 기반으로 부정거래 탐지 및 리스크 관리를 수행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AI 환경에 최적화된 지불 경험과 시스템을 지원하고자 한다.
핵심은, 소비자가 AI 에이전트를 신뢰하고 결제 권한을 위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비자는 카드 정보를 암호화된 디지털 토큰으로 전환해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스스로 승인한 AI 에이전트에게만 결제 권한을 부여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결제 활성화 시점과 조건도 오직 본인이 직접 설정할 수 있어 권한 위임과 통제 간 균형을 확보할 수 있다.
AI가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소비자의 동의를 기반으로 한 개인 맞춤형 서비스도 제공된다. 소비자는 자신의 결제 이력과 구매 데이터를 AI 에이전트와 공유할지 여부를 직접 선택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보다 정교하고 효율적인 쇼핑 경험을 누릴 수 있다. 이는 소비자 경험을 고도화할 뿐 아니라, 브랜드 입장에서도 높은 구매 전환율과 고객 충성도를 기대할 수 있도록 한다.
또한, 소비자는 AI의 지출 한도와 사용 조건을 사전에 설정할 수 있고, 모든 거래 과정은 실시간으로 비자 네트워크와 공유된다. 따라서 관리와 결제 통제 측면에서도 높은 신뢰성을 제공하며, 금융기관과 판매자 입장에서도 검증된 거래로 안심할 수 있는 구조가 완성된다.
비자 인텔리전트 커머스는 이르면 올해 말부터 미국에서 상용화가 시작될 예정이다. 현재 글로벌 차원에서 API 및 프로그램 샌드박스 테스트가 진행 중이며, 이를 기반으로 아시아 태평양 지역 파트너들과의 협의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특히 AI 커머스 확산을 가속화하기 위해 비자는 소비자와 가맹점이 주로 활용하는 AI 플랫폼 및 브랜드들과도 파트너십을 구축 중이다. 한국은 고도화된 디지털 인프라를 갖추고 있고 챗GPT 유료 구독자수가 세계 2위 에 달할 만큼 AI에 대한 국민들의 수용성이 갖춰진 시장인 만큼, 가까운 시일 내에 에이전틱 커머스 환경을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기술은 계속해서 진화한다. 그러나 그 기술이 실질적 도입과 정착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뢰의 기반 위에서 작동해야 한다. 에이전틱 AI 역시 예외는 아니다. 소비자가 자신의 구매를 대신할 권한을 위임하고, 금융기관이 AI를 신뢰하며, 판매자가 그 거래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각 이해관계자 간의 신뢰 관계가 먼저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신뢰 기반 인프라의 구축은 단순히 자국 시장을 위한 준비에 그치지 않는다. 앞으로 다가올 에이전틱 커머스 환경에서는 물리적 국경보다 디지털 신뢰 체계가 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며, AI를 활용해 얼마나 다양한 시장과 고객을 포용할 수 있는지가 핵심 경쟁력이 될 전망이다.
국내 카드사 및 핀테크 업계 또한 결제 경험 고도화와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해 AI 에이전트 도입을 모색하고 있다. 다만 기술의 빠른 도입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이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을 미리 설계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글로벌 표준에 부합하는 전략과 정책, 그리고 신뢰할 수 있는 결제 인프라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 조건이 충족될 때 비로소 에이전틱 커머스는 소비자에게 실질적인 편의를 제공하는 동시에, 시장과 사회 전반에 걸쳐 신뢰 가능한 방식으로 안착하게 될 것이다.
패트릭 스토리 비자 코리아 사장
〈필자〉미국 샌프란시스코대에서 경제학 학사, 금융경제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1996년 비자(Visa)에 입사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욕, 싱가포르, 그리고 한국법인에서 다양한 직책을 역임해왔다. 비자의 비즈니스 기획 및 운영과 컨설팅 및 애널리틱스를 차례로 총괄했으며, 소비자 금융, 결제, 정보 서비스 등 여러 분야에 걸쳐 20년 이상의 경력을 쌓았다. 비자 코리아 사장으로 취임 후 카드사, 핀테크기업, 유통업계들과 협업하며 한국에 혁신적인 결제 및 데이터 솔루션을 도입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