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세금융신문=고승주 기자) 이재명 정부 초대 임광현 제27대 국세청장의 인생은 마치 잘 짜인 직물과 비슷하다. 그는 지방의 작은 마을 출신에서 중학교 때 서울로 떠나 명문고와 명문대를 나왔다. 군 생활은 보안병으로 지냈으며, 행정고시를 거쳐 철저히 국세청 최고급-최고위 보직 경로를 밟았다.
현직 공무원 시절 정권 교체로 국세청장에 오르진 못했으나, 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연합 비례대표 4번을 받아 확정권에 배치됐으며, 이재명 정부 출범 후 국세청장에 올라 권력기관 마지막 보루를 지키게 됐다.
문민정부 이래 많은 국세청장이 있었지만, 정부·여당에서 동시에 높은 신임을 받고, 그 둘 사이를 오갈 수 있고, 오갈 것이라고 기대받는 인물은 임광현 국세청장이 유일하다. 이는 순전히 그의 역량 때문만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제아무리 뛰어난 인물도 시대란 큰 흐름에선 조각배에 불과하다. 임광현 청장이 거친 시대를 짚어봤다.
◇ 홍동 계장댁 두 형제
임광현 국세청장은 1969년 5월 12일 충남 홍성군 홍동면 홍원리 모전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 임규명 씨는 홍성군청 계장을 지냈고, 모친 송순자 씨 가문은 홍성 지역 청과물 사업을 하고 있다. 부친과 모친 쪽 사람들은 홍성 주요 인사들로 거론된다.
임광현 청장과 임건수 씨 형제 모두 지역에서 이름난 수재였다. 임광현 청장은 홍동초, 홍동중학교 2학년 재학 중 서울로 유학, 서울 강서고를 거쳐 연세대 88학번 입학, 1994년 행시 38회에 재경직에 합격해 엘리트 공무원이 됐다. 다섯 살 아래 동생 임건수 씨(74년생)는 형처럼 홍동초, 홍동중을 나와 서강대 수학과(92학번)를 나왔다.
임건수 씨는 한국 온라인 게임 1세대 개발자로서 2002년 정식 서비스를 개시해 한국과 일본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라그나로크 온라인(개발사: 그라비티)의 핵심 개발자다. 둘 모두 공부를 잘했으나 동생 쪽은 관심 분야에 매진하는 성향인 반면, 임광현 청장은 모나지 않는 철저한 모범생으로 알려진다.

◇ 쿠데타, 제2의 고향, 종로
임광현 청장에게 종로는 매우 특별한 지역이다. 그가 군생활을 했던 곳이며, 국세청 수송동 청사에서 세무공무원으로서 주요 경력을 쌓았던 곳, 그리고 그가 공무원 퇴직 후 옮겨간 세무법인 선택 회장 시절 일터였다.
1990년 2월 군번인 그는 보안병과 082번(현 1541번)을 부여받고, 지금 국군방첩사령부의 전신인 국군보안사령부로 자대 배치를 받았다. 당시 보안사는 지금 경복궁 건너편 국립현대미술관 자리에 있었고, 임광현 청장도 이곳에서 군생활을 했던 것으로 관측된다.
보안병이 되기 위해선 위부터 옆까지 친인척 검증을 받는데, 말 잘 듣는 우등생이면서도 모범생인 친구들이 많았다고 한다. 보안사 군인들 가운데에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포섭돼 전향 및 밀고자도 있었다고 한다. 숨은 배신자들을 정보요원으로 사용하고, 이들을 경찰 등 사정기관에 심는 수법은 한국 외에도 여러 기관들이 사용하는 수법이다.
군인은 군복을 입고 머리를 깎아야 하지만, 보안사 들은 사복을 입고 다니고, 두발 규제도 받지 않는다. 보안 서약이나 전역 후 약간의 제약이 있긴 하지만, 어느 부대서든 두려움 담긴 존중을 받는다.
보안사는 온갖 정보를 수집했다. 본 역할은 간첩을 막고, 군사기밀을 지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보안사의 어두운 역사는 그게 아님을 증명한다.
임광현 청장이 입대한 1990년, 그 해가 그랬다. 보안사는 비밀리에 ‘청명계획’을 추진했었다. 정치, 종교계, 노동 등 각계 민간인을 사찰하고, 사찰 대상의 친인척, 친구, 이동 동향 정보를 수집, 비상사태 발동 시 그들을 신속히 체포, 잡아 가두는 계획이었다. 목적은 군 출신 정권을 유지를 위한 군 친위쿠데타. 그것이 실행됐다면, 임광현 청장은 자칫 군인 신분에서 ‘내란의 밤’을 맞이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아주 미약한 등불 하나가 비극을 막았다. 1990년 10월 4일 보안사 윤석양 이병은 청명계획 자료를 몰래 빼내 외부에 폭로했다. 이등병 한 명의 용기가 한국을 독재에서 구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민간인 불법사찰과 손을 끊겠다는 의미에서 보안사를 기무사로 이름을 바꾸고, 표면적으로 기무사령관과 독대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2005년 고 노회찬 의원의 ‘안기부 X파일-미림팀’ 폭로, 12·3 윤석열 내란 친위 쿠데타 및 현 상황을 보면, 군이 크게 바뀌었다고 볼 수 없다.
1990년 임광현 청장이 당시 그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다. 보안사는 기무사로 이름을 바꾸고(1991년), 일반병들에게 핵심 업무를 맡기지 않게 됐다고 한다. 임광현 청장은 단계적 병역기간 단축으로 복무기간이 2개월가량 줄어들었던 것이 마냥 기뻤을 수 있다. 그렇게 개인이라면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34년 후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 연수원과 배우자, 노무현·박근혜 정부
임광현 청장은 전역 후 추가로 1년 반 정도 공부해서 1994년 11월 행정고시 38회 재경직에 합격했다. 지금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은 당시 중앙공무원교육원이라고 불렸는데, 그곳에서 임광현 청장은 훗날 배우자가 되는 이경은 씨와 깊은 관계가 되었고, 곧바로 결혼했다고 한다.
이경은 씨도 예사 사람은 아니었다. 68년생인 이경은 씨는 이화여고, 서울대 사범대 불어교육과 87학번으로 임광현 청장보다 한 살 위 누나다. 출신지는 서울로 기록돼 있긴 한데, 그녀의 동생인 이승엽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연수원 27기)가 제주 출신이라는 점, 부친이 제주 토박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경은 씨 역시 제주 출신일 수 있다.
이경은 씨는 대학 졸업 후 잠시 연합뉴스 기자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다가 1994년 11월 행정고시 38회 일반행정직으로 공직에 들어왔다. 언론사 재직 경험 때문인지 공보처에서 첫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1998년 2월 이경은 씨 경력에서 중대한 기점이 발생했다. 당시 정부는 조직 개편으로 문화체육부를 문화관광부로 개편하면서 공보처는 공보실로 격하됐다. 문체부 내 청소년 행정업무 중 정책을 제외하고 청소년 성 문제·유해매체 등 실무가 국무총리실 소속 청소년보호위원회로 넘어갔다.
◇ 국세청 ‘조사통’의 탄생
임광현 청장이 조사통으로 성장하기까지 두 개의 키워드가 있다. ‘비서(보좌관)’ 그리고 ‘임환수’다. 공무원 사회에서 기관장 ‘비서(보좌관)’ 출신들은 각별한 인물로 주목받는다. 이른바 될성부른 떡잎이다.
자격은 두뇌·눈치·평가·신원·표면적 언행 등 종합적으로 꽉 찬 육각형 인재라고 한다. 윗선에서 보기에는 일단 편해야 한다고 한다. 낯설어선 안 되며, 입이 무거워야 하며, 몇 다리 안 거쳐도 나와 가깝다면 제일이다.
임광현 청장은 2009년 1월 백용호 제18대 국세청장 보좌관에 임명돼 약 4개월 넘게 이현동 제19대 국세청장의 보좌관으로도 활동했다. 이현동 청장 인사청문회 공신 중 한 명이다.
임광현 청장이 보좌한 백용호 청장은 국세 경력이 전무한 인물이었는데, 도곡동 사태로 국세청장이 급박히 교체됐던 시점이었다. 그 시기, 그 기관장의 비서가 됐다는 건 특별한 신임 없이 불가능하다.
또 하나의 키워드, 임환수 제21대 국세청장은 임광현 청장의 국세 경력에서의 선구자 격이다.
2005~2006년 임광현 청장은 국세청 정책홍보관리관 산하 혁신기획관실(현 기획조정관 혁신정책담당관실)에서 사무관에서 서기관으로 승진했다. 참여정부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주관으로 각 정부기관 내 혁신을 주문했다.
국세청은 가장 모범적인 우수 혁신기관이었다. 혁신기획관실의 주요 성과는 지식관리시스템과 성과관리시스템 혁신인데, 이중 성과관리가 임광현 청장의 작품이었다. 임광현 청장은 이를 통해 2005년 근정포장을 받고 2006년 서기관 승진 티켓을 따냈다.
그때 국세청 혁신기획관이 임환수 제21대 국세청장(행시 29회)이었다. 임환수 전 청장에 대해 사람들은 그가 잔정이 있고 겸손한 듯하나, 권력 앞에 비정하고 고압적인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도 정무 판단·조직 장악 능력은 최상급이며,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기가 막혔다고도 말한다.
임광현 청장은 임환수 전 청장과 정치 성향·경력은 다르지만, 데칼코마니 같은 국세 경력을 가졌다. 임환수 전 청장은 국세청장 비서를 시작으로 본부·지방국세청 조사국장만 여섯 번을 거쳤다.
핵심 보직인 국세청 조사국장,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장, 서울지방국세청 조사1국장을 거쳤다. 개인·고소득자를 조사하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2국장, 중부 지역 법인조사를 담당하는 중부지방국세청 조사1국장도 지냈다.
임광현 청장도 국세청장 비서와 여섯 번의 조사국장을 거쳤으며, 위의 다섯 개 같은 보직을 걸었다. 국세 경력만 따지면 이와 비견될 경력을 가진 인물은 없다.
조사통인 한승희 22대 국세청장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임경구 전 국세청 조사국장 정도가 비견될 만하지만, 1급 승진은 하지 못했다. 박근혜 정권이 국정농단으로 실각하지 않았다면 정재수 전 제51대 서울지방국세청장이 주요 조사국장 다수를 싹 쓸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가정법은 없다.
위에서 언급된 한승희(행시 33회)·임경구(행시 36회)·임광현(행시 38회)·정재수(행시 39회) 모두 임환수 전 청장과 연이 있다.
임환수 전 청장은 사람을 고를 때 추진력과 단호함을 매우 중하게 여긴다고 한다. 믿을 만한 사람은 조사통으로서 기른다. 위 네 명은 그런 사람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다.
다만, 임광현 청장의 세무조사 스타일은 다른 이들과 약간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세무조사는 추징액이 성과와 직결되기에 아무래도 목표지향적이 되기 쉽다.
임광현 청장은 조직력만이 아니라 스마트함과 합리성을 중시하며, 최대한 실수 없는 과세에 집중했다고 알려진다. 임환수 전 청장이 국세청장으로 재임 시절에는 국세청이 온갖 조세불복 소송에 휘말리던 시점이었기에, 이러한 스마트함은 어쩌면 인사 평가에 큰 강점이 되었을 수 있다.
◇ 새로운 깃발
누군가가 잘 나가려면, 누군가는 밀려나야 한다. 행시 30·31·32·34·35·37회들이 그랬다. 잘나가던 이들도 정권 따라 밀려나기도 했다.
만일 임광현 청장이 충청 출신이 아니라 TK였다면, 오늘의 임광현 청장은 없을 수도 있었다. 문재인 정부에서 임광현 청장은 2020년 9월 서울지방국세청장, 2021년 7월 국세청 차장 등 국세청 최고의 권력자로 부상했다.
그렇지만 윤석열 정부에서 끝내 풍랑에 휘말렸다. 윤석열 정부는 문재인 정권을 철저히 배척했다. 문재인 정부 국세청 조사국장을 지낸 임광현 청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임광현 청장은 2022년 7월 국세청에서 퇴직했지만, 정치인이 될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광현 청장이 어떻게 정치에 입문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표면적인 추천자가 있긴 한데, 비례대표까지 추력을 대준 건 다른 사람이라고 한다.
‘비례대표 4번은 이재명 당 대표의 직접적 신임을 뜻한다’, ‘임광현 청장의 배우자 남동생(판사 출신 이승엽 변호사, 연수원 27기)이 이재명 대통령 관련 굵직한 변호를 했다’, ‘‘관’에 약한 민주당이 약점 보강을 위해 영입했다’, ‘민주당 내 사정·정보·군사 관련 복합적 역량이 필요했다’, ‘윤석열 정부 정치적 세무조사 카운터다’ 등 세간에선 여러 주장이 거론됐지만, 당이나 임광현 청장이 공식적으로 밝힌 바는 없다.
임광현 청장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겸손과 유능으로 호감을 샀다고 하는데, 정작 본인이 자기 캐릭터 홍보에는 소극적이었다.

무수한 언론 인터뷰 제안 중 개인에 대한 인터뷰에는 응한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세청 차장 시절 네 편의 언론 기고문을 쓰긴 했지만, 다소 형식적 글이었고, 2분 33초짜리 더불어민주당 인재영입 22호 영상 역시 어디선가 한두 번 봤을 문구들로 구성했다.
영입 당시 의정 목표는 부자 감세 지양, 복지국가 재원 마련이었는데, 의정활동 초반에는 국민의힘 부자 감세를 비판하는 공격수로 주로 활동했다. 금융투자소득세를 완화해도 예정대로 시행을 위해 국민의힘, 민주당 내 의원들과 논쟁했고, 공개 토론 등 호승심 넘치는 검투사 역할도 자처했다.
유산취득세는 반대하지만, 서울 및 주요 도시 선거 접전 지역 내 표심을 의식한 듯 상속세 기본공제 상한 확대를 추진하기도 했다. 상속세 기본공제 확대는 서민 입법은 아니다. OECD 중산층 기준은 중위소득의 0.5배~1.5배이고, 아주 제한적인 조건이 아니라면 이 구간에서 상속세를 낼 사람은 희박하다.
친정인 국세청을 상대로는 정치적 세무조사를 짚고 넘어가기도 했다. 국세청 세무조사가 정무적 판단하려면, 국세청장과 국세청 본부 조사기획과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쌍방울 세무조사처럼 검찰 수사가 연관된 세무조사가 그러한 경우인데, 표면적으로는 서울지방국세청장과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 조사기획과가 독단으로 결정했다고 답한 것이 사리에 맞을 수가 없음을 지적했다.
이로 인해 2024년 더불어민주당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선정됐다. 실질적 입법활동은 맞벌이·아동양육 쪽 비중이 높았다. 민주당 월급방위대 간사를 맡았던 영향으로 보인다.
◇ 기브스와 꽃
임광현 청장은 표면적으로는 모범적 성공 인생을 걸었다. 명문고와 명문대를 나온 모범생이, 정부 공인을 받은 모범 군인이 되고, 공직사회 엘리트 모범 공무원으로 커서, 모범 국회의원까지 됐다.
정치인에겐 손해를 감수해도 올바른 행동을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불의에 대한 분노와 사람들을 감싸는 덕성. 전자는 나름 쉽게 볼 수 있지만, 후자는 드물다.
임광현 청장은 의로운 분노에는 어느 정도 다가간 듯하다. 2024년 12·3 윤석열 내란 계엄·친위 쿠데타는 그조차 국회 담을 넘게 했다. 그 과정에서 손가락이 부러졌고, 그때 기브스는 가보가 됐다.
쿠데타는 우연이 겹쳐 현재 잠정적 실패 상태지만, 당시엔 아무도 무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국회·용산 주변 CCTV 영상이 끊겼었다. 도시교통정보센터가 인터넷에서 24시간 제공하던 영상이었다.
다음은 국내 방송, 외신 차례였다. 그 다음이 있다면, 장소·지위 관계없이 침묵하지 않았던 사람들 차례였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체포 1순위였다.
옛 동료 의원이 “국세청은 사정기관 가운데 그마나 믿을 수 있는 보루”라고 말했듯, 이제 국세청장이 되었으니 국세청 내 오염 흔적을 지우고 국민을 위한 기관으로 쇄신하는 일이 남았다.
다음은 덕성이다. 임광현 청장의 이 부분 관련 특별한 단서를 확인하지 못했다. 이 부분은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 알아보는 덕목인데, 그 예로 국회 청소 노동자들이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선서 직후 이들을 찾아 무릎 굽혀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이들은 국회 내 이웃이자 꽃을 나눠주던 의원회관 앞에서 고 노회찬 의원의 영결식을 지켰다.
임광현 청장의 기브스는 종착지일 수 있다. 아니면 새로운 출발선일 수도 있다.
화사한 꽃은 계절을 이길 수 없다.
매화는 지더라도 일찍 꽃 피운다._영조매(咏早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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