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2기와 한국의 전략: 통상산업정책 2.0 어떻게 짤 것인가
트럼프 2기 출범은 세계 교역질서의 재편을 가속화해 한국 경제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중국 기술봉쇄와 제조업 회귀를 목표로 자유무역체제의 전면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 경제의 새로운 도전과제다. ‘통상산업정책 2.0’을 설계해 새 교역질서에서 지속가능한 발전모델을 만드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미국의 대중국 기술규제는 겸용기술(dual-use technology·민군 겸용기술)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대표적 사례가 화웨이의 5G 통신장비와 관련된 규제다. 5G 기술은 단순히 인터넷 연결속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군사통신·국가안보에 직결된다. 인공지능(AI)칩과 바이오기술은 겸용기술의 또 다른 사례다. AI칩은 자율 무기시스템, 군사 드론 등 첨단 군사기술에서 핵심부품으로 사용되며, 바이오 기술은 전염병 대응뿐 아니라 생물무기와 같은 민군 겸용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2기는 이러한 기술의 군사적 활용 가능성을 이유로 대중국 수출규제를 더욱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전세계적 공급망을 통해 최저비용을 추구하는 세계무역기구(WTO)로 대표되는 자유무역 국제 교역질서와 글로벌 가치사슬을 안보적 관점에서 재편하려는 것이다.
트럼프의 화석연료 규제 완화는
에너지 전환 시간벌기 위한 전략
우리 생산기술은 대미 거래 자원
고도화 지원하고 혁신 뒷받침을
제조업 구조전환 펀드 조성 통해
국가가 기업의 리스크 분담해야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한국은 반도체·배터리·바이오 기술 등 첨단산업 덕분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과의 기술분리를 가속화할 경우, 한국은 선택과 집중의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특히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 속에서 동맹국들에 안보협력을 명분으로 공급망 재편에 동참할 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한국이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미국 중심의 새로운 가치사슬에서 기술 주도권을 확보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을 의미한다.
트럼프 : 고립주의와 제국주의의 결합
트럼프의 대외정책은 과거 먼로주의와 유사하게 미국 중심주의를 기반으로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원하는 것을 거래적 방식으로 확보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트럼프가 취임하면서 매킨리의 도금시대(Gilded Age)를 연상시키는 황금시대(Golden Age)를 연다고 한 것과 미국의 전통적인 대외정책인 먼로주의로의 회귀를 주장한 것에서 트럼프의 대외정책 방향을 읽을 수 있다. 매킨리는 미국이 제국으로 확장하는 길을 열었다. 미국의 전통적인 대외정책의 골간은 미주 대륙에 대한 미국의 배타적 영향력과 유럽 지역에 대한 불개입, 즉 고립주의를 원칙으로 한 먼로주의였다. 이 먼로주의에 변화가 생긴 것은 윌슨 대통령이 제1차 대전에 참전해 유럽에 개입하면서다. 트럼프의 정책은 윌슨의 국제주의를 탈피하고, 먼로주의적 고립주의를 바탕으로 매킨리의 제국주의적 요소를 결합한 혼합 모델로 볼 수 있다.
트럼프의 대외경제정책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보편관세(General Tariffs)다. 보편관세 정책은 닉슨 대통령이 1971년 금태환 정지를 선언할 때 10%의 일률적인 수입관세(보편관세) 부과가 포함돼 있었다. 닉슨은 보편관세가 단기적으로는 효과적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미국 경제와 외교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편관세가 직관적이라 대중에게 설득력이 높기 때문에 철폐하는 데 주저하다가 대외 협상의 레버리지로 사용한 후 1973년 폐지하였다. 트럼프도 닉슨의 취지를 강화해 협상 상대국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내는 수단으로 사용할 것으로 보인다. 닉슨과는 달리 트럼프는 보편관세를 지정학적 무기로 사용하는 공격적·거래적 방식을 취한다는 특징이 있다.
한국 제조업 체질 전환의 기회
미국 대선의 가장 큰 쟁점은 물가였고, 고물가의 원인 중 하나는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의 에너지 가격 상승이었다. 트럼프는 에너지 가격을 낮추기 위해 화석연료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이는 화석연료 시대로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 전환을 위한 시간을 버는 전략이다. 에너지 전환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급격한 비용 상승과 산업 충격을 완화하며, 기존 제조업 기반이 새로운 에너지 체계에 적응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에너지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내연기관에서 전기차·수소차로의 전환이 필수 과제가 됐다. 내연기관 차량에 들어가는 부품 수는 약 3만여 개지만, 전기차는 이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기존 부품 제조업체들은 생존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약간의 기술 변형과 응용을 통해 새로운 부품 산업으로 전환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예를 들어 배터리 관리시스템(BMS), 전력 변환장치 등 전기차 핵심부품은 기존 제조업 기술의 연장이자 업그레이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한 전환비용은 해당 기업 스스로 하기 어렵다. 전환을 위한 리스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트럼프 2기의 화석연료 정책이 주는 시간을 활용해 국가가 전환 리스크의 일부를 부담하는 정책을 시행하면 새로운 기회를 창출할 수 있다.
미국은 자국 이익을 최우선으로 삼으며 동맹국들에도 비용 부담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미국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동시에, 자국 목표에 부합하는 혜택을 얻어내는 유연한 통상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겸용기술의 확산, 글로벌 가치사슬의 재편, 제조업 체질 전환이라는 변화를 통해 한국 경제는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 트럼프의 미국이 원하는 것의 힌트는 트럼프가 우리나라의 조선업을 거론한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업은 상업용뿐만 아니라 군함 건조 등 군사용으로 전환할 수 있다. 미국은 반도체와 같은 핵심 산업의 리쇼어링(국내 복귀)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를 단기간에 실현하기는 어렵다. 한국은 제조업 기반이 넓고 강하다. 자동차(내연·전기)·반도체·이차전지·정보통신기술(ICT)·방위산업·조선·철강·석유화학 등 거의 모든 산업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다. 대부분의 선진국이 몇몇 산업에서 경쟁력을 갖지만 한국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경쟁력을 보유한 국가는 찾기 어렵다.
중견기업 생산기술이 우리 경쟁력
우리나라 제조업의 생산역량에 주목할 건 대기업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중견기업의 생산기술이다. 최근 반도체산업에서 주목받는 TSMC를 보자. 반도체산업에서 중앙제어장치(CPU)가 부가가치가 가장 높고, 메모리가 다음이고, 파운드리는 부가가치가 가장 떨어지기 때문에 파운드리는 중견기업 수준에서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반도체산업에서 팹리스, 즉 제조공장을 가지지 않고 아이디어와 설계를 주로 하는 업체가 등장하고 이 기업들이 제조를 외부에 위탁하는 것이 일반화됐다. TSMC는 마진은 적지만 생산효율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 생산기술은 학습효과에 따라 노하우가 축적돼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TSMC는 이렇게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팹리스 설계 잘못까지 고쳐줄 수 있는 파트너로 성장했다. 우리 제조업의 경쟁력 원천 중 하나도 생산기술에 있다. 이 기술은 지속적인 생산을 통해 축적된 암묵지, 즉 노하우로 축적된 결과다. 문제는 이런 생산기술을 보유한 기업이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견·중소기업에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제조업 생산기술은 트럼프가 국내 제조업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자원이 되기 때문에 이 생산기술을 거래의 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 기업들이 개별적으로 에너지 전환 투자를 하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국가가 리스크를 줄여주는 산업정책이 필요한 이유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책 변화는 한국에 제조업 체질 전환과 새로운 통상질서에 적응할 기회를 제공한다. 정부와 금융기관이 협력해 제조업 고도화를 지원하고 기업의 혁신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정부는 이러한 전환을 지원하기 위해 구조전환 펀드를 설계해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리스크를 분담해야 한다. 이는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기존 제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도 신산업을 육성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될 것이다. 화석연료 규제 완화에서 번 시간에 구조전환을 하지 못하면 제조업 생산기술의 암묵지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제조업의 구조전환, 신산업 육성을 위한 정책 지원을 통해 한국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이 ‘통상산업정책 2.0’의 과제다.
국가의 역할은 기업가 정신 살리기
통상산업정책 2.0에서 주요 전략 산업·기업에 대한 국가의 지원은 불가피하다. 그러면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지원을 받는 기업은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우선 국가가 지원대상 산업과 기업을 선정할 때 기존 산업정책처럼 국가가 주도해 대상을 선정해서는 안 된다. 기존의 산업정책에서는 정부가 민간보다 정보의 우위가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정부보다 민간이 정보 취득에 우위에 있다. 우리 기업은 더이상 후발주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생존경쟁을 해야 하는 절실함도 있다. 따라서 정부는 큰 방향을 정하는 것에 머물러야 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기업들이 결정하게 놔둬야 하며 정부는 그 리스크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다음으로 주의의무(Duty of Care)를 다한 경영 판단에 책임을 묻지 않는 대법원 판례와 같이 정책판단의 원칙을 명확히 해야 한다. 기업 지원에 대한 어떤 정책 결정도 불확실성으로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사후적으로 결과를 보고 책임을 묻는 정책 환경에서는 그 어떤 결정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기업 경영자의 경영 판단 원칙도 더욱 명확히 정립해야 한다. 이와 같은 관행을 정립돼야만 기업이 새로운 리스크를 취하는 기업가정신을 발휘할 수 있다. 이것은 리더십의 재정립에 의해 가능하다. 2025년 우리는 이런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용우 경제더하기연구소 대표·서울대 경영대 객원교수·전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