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하다 보니 애착템이 되고 말았다. 사진은 실물보다 훨씬 더 멀쩡하게 나왔다. 잘 신고 다니지 않고 들고 다니지도 않는데 신발과 가방을 사 모으는 게 유일한 사치이자 취미였다. 딱히 비싼 게 아니라 독특한 모양이거나 한정판 같은 거였고, 색상을 고르기 어려울 땐 색깔별로 사는 식이었다. 대개 한 켤레만 신었고 이것저것 호주머니에 넣고 다녀서 늘 호주머니가 불룩했다.
그러다 보니 사놓고 누구 주고, 다시 채워 넣었다가 누구 주고, 이러길 반복했다. 한번은 올케에게 사람이 들어갈 만큼 커다란 자루 2개에 신발과 가방을 가득 넣어서 줬더니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신발과 가방을 보고 가지게 된 건 처음이라며 놀라 했던 적이 있다.
삶의 절반은 발가락 슬리퍼를 신었고, 엄지발가락과 무릎과 걸음걸이에 안 좋대서 재작년쯤부터는 가급적 슬리퍼를 신지 않는다. 슬리퍼 신을 기회가 줄어들었다는 게 맞으려나. 최근 몇 년간은 ‘개스 활명수’를 샀더니 부채가 그려진 게스 연청지 가방을 주길래 들고 다니다가 작년부터는 울주군청과 울주문화재단 회의 때 견본이라고 준 검은색 작은 면 가방을 들고 다닌다.
현장을 뛸 때를 제외하곤 신발이 닳아서 버린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잘 안 난다. 20대 때 키가 더 커 보이고 싶어서 10센티미터 가까운 왕통굽 스판 앵클부츠를 사계절 내내 신고 다닌 적이 있는데, 굽이 높은데도 어찌나 편했던지 현장에서도 신고 다녔었다. 3년쯤 신었더니 너무 낡아서 똑같은 걸 다시 샀는데, 이전의 그 편안함이 느껴지지 않아 잘 안 신게 됐다. 내 발 모양도 바뀌었을 것이고, 신었던 신발이 내 몸의 일부처럼 맞춰졌을 것이고, 이후에 구매한 신발이 재질이나 성능이나 만든 사람의 손맛이나 뭔가가 달라졌기 때문일 거다.
신발과 가방에 대한 내 습관은 개를 키우면서부터 없어진 것 같다. 여유가 있을 땐 하루에도 몇 번씩 산책했고, 산책 시간이 길었다. 이 동네가 휑했을 땐 시멘트보다 자갈밭이 많았다. 아니지. 자갈밭이 많았다기보다 흙과 돌이 많은 길로 더 많이 더 오래 다녔다는 게 정확하겠다. 그랬더니 신발이 빨리 닳는, 그러니까 내가 산 물건이 빠른 속도로 헤져서 버릴 수밖에 없는 일이 이어졌다.
닳아서 더 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물건을 쓴다는 그 만족감, 묘하게 쾌감이 있다. 그래서 사두고 신지 않는 신발들, 누구 주기엔 좀 부족함이 있는 신발들, 개 산책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신발들을 신고 나갔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발가락이 튀어나오거나 밑창이 닳아서 빗물이 스며들 정도가 될 때 기쁜 마음으로 수명을 다해준 내 신발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버렸다. 빨간색도 있었고, 분홍색도 있었고, 노란색도 주황색도 하늘색도 파란색도 진녹색도, 그리고 흰색과 검은색도 있었다.
나는 양말이 100켤레쯤 됐다. 주로 발목이 짧은 양말이다. 바쁠 땐 두세 달씩 세탁기를 못 돌릴 때도 있어서 매일 갈아입고 신어야 하는 섬유 종류가 많다. 그런데 개를 키우면서부터 뒤꿈치와 엄지발가락 아랫부분이 닳아서 구멍 난 양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놀랐다. 스물다섯 칸짜리 양말 보관함 2개에 가득 차 있던 양말들이 지난 6년 동안 30퍼센트 정도까지 줄었다. 때때로 구멍 난 양말은 까망이의 장난감으로서 최후를 맞이한다. 처음엔 멀쩡한 베개를 뜯어 멀쩡한 양말에 솜을 넣고 장난감을 만들어주기도 했었다.
내가 양말에 구멍이 나서 버린 적이 있었던가. 발톱을 제때 안 깎아 엄지발톱 부분에 구멍이 나거나 가로나 세로로 늘어난 경우라면 몰라도 자주 신고 많이 걸어서 닳았던 적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발가락 슬리퍼를 많이 신었던 만큼 양말을 잘 안 신었기도 했고. 스타킹은 많이 신었고 한 번 신어도 올이 풀려 버리는 일이 많았는데 양말은 글쎄다, 정말 기억이 안 난다. 어쨌든 개 산책할 땐 낡은 신발에 한 짝씩 남은 양말을 대충 모양 맞춰 신고 나가는 일이 많아졌다.
개 산책을 하면서 두 가지를 자주 생각한다. 누군가는 매일 바삐 움직이느라 신발이 자주 닳겠구나. 이까짓 산책 몇십 분만으로 나는 이렇게 지치는데 신발이 그렇게 빨리 닳는 일을 하는 사람은 정말 고단하겠구나. 아니, 즐거울 때도 많으려나. 그리고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이 왜 좋은 옷을 안 입고 좋은 신발을 안 신는지 알겠다. 내 올케가 그랬으니까. 어제 도착한 옷을 세탁기에 돌린 뒤 오늘 개시했는데 우리 털복이와 까망이가 좋다고 펄쩍펄쩍 뛰어오르면 올이 풀리고 구멍이 나니 좋은 옷을 입을 수가 있나. 개털은 기본이고.
어제 중요한 만남이 있었는데 늦잠을 자는 바람에 씻지도 못하고 뚱뚱한 몸에 맞는 아무 옷이나 걸치고 나갔다. 얌전히 앉아 있는데 문득 오른쪽 허벅지에 점점 커지는 중인 구멍과 왼쪽 정강이뼈 쪽에 세로로 길게 올이 풀린 게 눈에 들어왔다. 체면이 제법 중요한 자리였는데 그냥 피식 웃고 말았다. 온몸에 개털이 붙어 있는 것도 이젠 개의치 않는다. 옷에 털 묻는다고, 옷에 생채기 난다고 내 개들한테 저리 가, 할 순 없지 않나.
곧 쓰레기봉투에 들어갈 신발이 어찌 된 일인지 수명이 길다. 여기저기 원단이 찢어지고 헤졌는데 아직 발가락이 안 나오고 신발 바닥도 며칠 전에 뭐가 조금 떨어져 나갔을 뿐이다. 그래서 고집스럽게 이 신발을 더 자주 신고 다닌다.
지금껏 닳아서 버린 신발들 사진을 좀 찍어둘 걸 그랬다. 그랬다면 내 개들과 함께 이런저런 기억을 더 많이 남길 수 있었을 텐데. 자. 얼른 원고 끝내고 이 신발 신고 나가자! (내 개들은 사람 말을 몇 마디 못 알아듣는데 나가자, 이 말만큼은 입 모양만으로, 아주 작은 소리라도 귀신같이 알아듣는다.)
이민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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