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융복합이 특징인 4차산업혁명 시대의 기술은 얼마든지 농업과 결합할 수 있는데, 이를 촉진하고 지원해야 할 제도가 산업화 시대에 멈춰 서 있다는 진단이다. 전세계가 인공지능(AI) 분야 주도권을 놓고 명운을 건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디지털 시대’와 ‘아날로그 제도’의 간극을 좁히는 일이 농업계에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과제로 지목된다.
애그테크와 푸드테크 등 첨단 농산업이 새로운 먹거리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현행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기본법(농업식품기본법)’은 농산업의 정의와 범위를 명확히 규정하지 않아 이들 산업을 시의적절하게 육성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받는다. 농산업의 개념과 범주를 명확히 하고 정책 지원의 법적 근거를 강화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최근 내놓은 ‘미래농업에 대응한 농산업 개념 재정립 연구’에 따르면 스마트팜 기자재 등 농업 전후방산업의 부가가치는 2020년 96조9460억원에서 2022년 113조8200억원으로 연평균 8.4%, 운수업 등 간접 관련 산업은 125조4910억원에서 149조4060억원으로 9.1% 증가했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 전체 산업의 부가가치 증가율(6.2%)을 웃도는 수치다. 농경연은 농업과 농업 전후방산업을 ‘협의의 농산업’, 여기에 간접 관련 산업까지 포괄한 개념을 ‘광의의 농산업’으로 정의했다.
하지만 현행법에 ‘농산업’의 개념과 범위가 명확하지 않아 정책 지원의 근거가 부족하다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된다. 새로운 산업이 등장할 때마다 하위 법령을 마련해 지원 근거를 따로 만들어야 하다 보니 첨단 농산업의 적기 성장이 어렵다는 지적도 이어진다. ‘농업시설’로 인정받지 못해 도입 초기에 어려움을 겪었던 수직농장, 농사용 전기요금을 적용받지 못하는 농촌융복합산업, 스마트팜 기자재의 부가세 영세율 적용 논란 등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정민 농경연 부연구위원은 “‘농업식품기본법’은 농업의 정의와 농산업 관련 산업을 나열하고 있지만, 정의·범주를 규정하지 않아 신산업이 등장할 때 농산업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다”며 “새로운 농업 관련 산업이 등장할 때마다 이를 농산업으로 인정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하위법 제정 등에 시간·자원이 소요돼 시의적절한 지원 정책 수립이 어렵다”고 했다.
미국은 농업 및 농업 전후방산업을 농산업으로 규정하고 있다. 미 농무부(USDA)는 농산업을 크게 ▲가공·포장 및 생산 부문 ▲농업 및 식품제품 저장 부문 ▲농업 및 식품 지원 시설 부문 ▲규제 감독 및 산업 조직 등 8가지로 구분한다.
농경연은 ‘농업식품기본법’에 농산업의 개념과 범주를 추가하되, 구체적 사항은 시행령이나 시행·행정 규칙으로 정해 시의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국회에서는 지난해 이만희 국민의힘 의원(경북 영천·청도)이 농산업 정의를 담은 ‘농업식품기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농업, 농산물 가공업, 농산물 유통업, 농업·농촌 관련 서비스업, 농업 관련 투입재산업과 그밖의 농업 전후방산업’을 농산업으로 규정하고,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발전계획’을 수립할 때 농산업 발전 전략을 포함하도록 하는 등 내용이 담겼다.
이같은 법안 검토 과정에서는 농산업 관련 규정이 추가되면 수직농장과 스마트팜 분야에서 거대 기업 자본이 농업 분야를 잠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비농민 중심으로 구성된 농업법인이 농업 분야의 지원 제도를 악용하는 ‘애그리워싱’ 행태가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기환 NH농협금융지주 NH금융연구소 부연구위원은 “현재 푸드테크 등 융복합 농산업은 양적 성장이 필요한 초기 단계로, 규제 유예·완화를 통해 자본과 참여자들의 시장 유입을 이끌 필요가 있다”며 “추후 시장이 충분히 성장하면 농산업 목적에 맞지 않는 사업을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해 질적 성장을 이끄는 식으로 정책을 전환하면 된다”고 말했다.
첨단 농산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대응과 조직 운영이 미흡하다는 평가도 있다. 예를 들어 푸드테크 분야에서는 전자산업처럼 청년들이 팹리스(설계) 단계에 참여하고, 식품공장이 파운드리(제조)를 맡는 형태로 청년 스타트업이 빠르게 늘고 있다. 하지만 현재 농식품부의 조직으로는 이런 청년들의 움직임을 충분히 뒷받침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안현실 울산과학기술원(UNIST) 연구부총장은 “AI와 푸드테크가 눈부시게 발전하며 농업과 식산업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지만 농식품부에는 푸드테크정책과와 스마트농업정책과만 달랑 마련돼 있다”며 “정책 혁신은 정부조직 혁신과 맞물려야 가능한 만큼 푸드테크와 스마트농업을 중심으로 조직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소진 기자 sjkim@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