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처음에는 밀가루를 만져 보지도 못했다. 새벽 5시부터 나가 제빵용 철판만 2000장씩 닦았다. "
‘JW 메리어트 제주’의 신임 총주방장 하형수(51) 셰프는 국내 호텔 외식업계에서 전례가 없는 인물이다. 글로벌 호텔·리조트 브랜드 최초로 총주방장에 오른 제빵사여서다. 특급호텔에선 양식 레스토랑 출신이 총주방장에 오르는 게 불문율처럼 여겨져 왔다.
하 총주방장은 시쳇말로 밑바닥부터 올라왔다. 1994년 부산의 한 빵집에서 제빵용 철판을 닦고, 밀가루 반죽을 치는 것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호텔가에서 “유리 천장이 깨졌다”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제주도에서 만난 하 총주방장은 “특급호텔도 다양한 미식 경험을 줘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라며 “이제는 디저트와 페이스트리(제빵·제과)가 호텔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Q : 페이스트리 셰프가 총주방장이 됐다.
A :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 시대가 달라졌다. 특급호텔이나 럭셔리 리조트도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트렌디하고 다채로워야 한다. JW 메리어트 제주도 전 업장에서 페이스트리와 디저트가 화룡점정의 역할을 한다.
Q : 요리는 언제 시작했나.
A : 원래는 성악가를 꿈꿨는데, 배곯기 딱 좋겠더라. 가장 좋아하면서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은 게 제빵이었다. 1994년 대학 졸업 후 부산의 한 빵집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Q : 처음부터 잘했나.
A : 밀가루 근처에도 못 갔다. 새벽 5시에 출근해 크루아상 철판만 2000장씩 닦았다. 온종일 땀을 빼야 하는 오븐 담당도 하고, 반죽 담당도 하고, 그렇게 하나씩 단계를 밟았다. 한창때는 혼자서 크루아상만 500개를 구웠다. 첫 월급이 40만원이었는데, 한 달에 두어 번도 제대로 못 쉬었다. 그때는 다 그렇게 일했다.
Q : 2002년 갑자기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A : 디저트의 본고장에서 제대로 배워보자는 생각으로 프랑스 리옹에 갔다. 경력을 인정받기도 어렵고, 차별도 있어서 힘들었다. 월급을 돈 대신 책으로 받은 적도 있다.
Q : 힘든 타국 생활을 어떻게 견뎠나.
A : 실력으로 증명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베이커리에 막내급으로 취직했는데, 반죽하고 팬 돌리고 칼질하고 이런 거 보더니 사장이 “너는 여기 있을 놈이 아닌데”라고 하더라. 10년가량 제빵 경력을 쌓고 갔기에 기술과 요리에 임하는 태도 하나는 자신 있었다. 결국 능력을 인정받아 프랑스 친구들보다 빠르게 헤드급으로 올라갔다.
2005년 한국에 돌아온 그는 파크 하얏트 서울에 둥지를 틀었다. 첫 직급은 주임이었다. 이후 주요 특급호텔을 거쳤다. 콘래드 서울에서는 부총주방장을 맡았고, 그랜드 하얏트 서울에서는 페이스트리 총괄 셰프에 올랐다. 그랜드 하얏트가 페이스트리 총괄 셰프로 임명한 첫 한국인이 그였다. 2022년 JW 메리어트 제주의 오프닝 멤버로 합류한 그는 이달 새로운 총주방장으로 승진했다. 갓 구운 크루아상을 테이블마다 올려주는 조식 레스토랑 ‘아일랜드 키친’, 빵 맛집으로 입소문 난 베이커리 ‘댄싱 두루미’, 그릴 전문 ‘더 플라잉 호그’ 등 전 업장에 그의 스타일이 배어 있다.

Q : 총주방장으로 어떤 비전을 그리고 있나.
A : ‘하이퍼 럭셔리’와 ‘합리적 가격’. 두 가지 가치를 조화롭게 실현하는 데 중점을 두려 한다. JW 메리어트 제주가 방값은 1박에 100만원이 훌쩍 넘는데, 뷔페 레스토랑은 인근 특급호텔보다 3만~4만원가량 저렴하다. 소시지처럼 손이 많이 안 가는 메뉴를 과감히 빼는 대신 캐비어·랍스터·샴페인 같은 핵심 메뉴를 강화했다.
Q : 쉴 때는 뭐하나.
A : 영감을 얻기 위해 백화점 명품 숍이나, 화장품 코너를 주기적으로 둘러본다. 화장 트렌드에서 색감과 재료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어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든 적도 있다.
Q : 하형수만의 음식 철학이 있다면.
A : 별것 없다. 맛있는 요리를 최고의 상태로 손님에게 내놓는 것이다. 조식 때 갓 구운 크루아상과 솥밥을 일일이 테이블에 제공하는 이유다. 맛있게 만드는 건 당연한 거다. 제때, 제 온도에 맞게 테이블에 내는 것이 요리사로서 마음을 다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백종현([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