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다름을 견디는 힘이 관계를 완성한다

2025-11-14

아내와 함께한 세월도 어느덧 36년이 넘었다. 아내와는 대화가 잘되는 편이다. 잘된다는 의미는 뭘까. 대화를 많이 한다는 뜻일까? 대화 내용이 살갑다는 말일까? 아니다. 맥락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말이 통한다는 의미다. 아내와 나는 공통주제와 관심사가 있다. 아내는 내가 말하지 않은 것까지 알아듣는다. 설명하지 않아도 맥락을 이해한다.

처음부터 그렇진 않았다. 무엇보다 서로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내는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알아” 하며 말을 끊기 일쑤였다. 나는 말을 하고 싶은데 아내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위로받고 싶은데 아내는 “뭘 그딴 걸 갖고 그러느냐”라고 했다. 나는 공감을 원하는데, “나도 힘들어. 내 얘기해 봐?” 하며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서로의 말에서 가식이 사라지고부터 대화가 자연스러워졌다. 살다 보니 꾸밀 필요가 없어졌다. 꾸며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자기 말을 검열하지 않게 됐고, 상대 말을 판단하는 버릇도 없어졌다. 그러면서 말문이 트였다.

우리는 또한 거절에서 자유롭다. 살다 보면 거절당할까 봐, 거절하면 상대가 불편해할까 봐 할 말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기탄없이 거절한다. 굳이 이유를 댈 필요도 없다. 싫으면 싫다고 한다. 거절을 당해도 기분 나쁘지 않다. 그것이 일상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나 사이에는 침묵이 어색하지 않다. 말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서운한 게 있나?’, ‘내게 불만이 있어서 저러나?’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라디오 방송을 진행하다 보면 대화가 이어지지 않고 중간에 정적이 흐르는 경우가 있다. 일종의 ‘방송사고’다. 하지만 아내와는 이 정적이 기본값이다. 항상 상냥함을 유지하는 건 피곤한 일이다. 서로에게 다정함에 대한 기대도 없다.

아내와 나는 같은 일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내가 강의하는 동안 아내는 근처 카페에서 내가 쓴 글을 검토해주거나 강의하는 데서 요구하는 업무를 처리한다. 아내와 산책하거나 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대화의 주제는 내가 강의하는 글쓰기, 말하기, 소통, 리더십과 관련한 것이 대부분이다. 내가 늘 아내의 생각을 묻기 때문이다. 처음엔 아내가 그런 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대화가 돈이 돼 돌아온다는 걸 깨닫고부터 아내가 먼저 묻고 대화를 이끌어간다. 대화하는 목적이 같아졌다.

이 모두가 다름을 인정한 결과다. 너무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조율하고 타협하고 절충하고 합의한 소산이다. 다름에 적응하는 데 30년이 걸렸다.

우리는 낯선 것보다는 닮은 사람을 좋아한다. 말이 잘 통하고, 취향이 비슷하고, 생각이 닮은, ‘내 편’이란 믿음을 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다름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다름에 거부 반응한다. 다름은 낯선 것이고, 낯선 건 두렵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는 결국 다름을 어떻게 다루느냐의 문제다. 직장에서, 가족과 친구 관계에서 생기는 대부분의 오해와 불신은 다름에서 비롯한다. 아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 그럼 이제라도 똑똑히 알아줬으면 좋겠어.” 갈등은 저마다 다른 욕구, 관점, 취향, 이해가 충돌할 때 일어난다. ‘그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고 받아들이면 갈등할 이유가 별로 없다.

내 경험으로, 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세 가지밖에 없다. 상대에게 내가 맞추거나, 상대방을 내게 맞추거나, 만나지 않거나. 세 번째는 방법이라고 하기 어렵고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법이 있는데, 상대를 내게 맞추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내가 맞춰야 하는데, 그건 상대의 다름을 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며 상대를 인정하고, 다름을 있는 그대로 두는 것, 그게 바로 관계의 여백을 만든다. 여백이 없는 관계는 언제든 부딪히고 쉽게 부서진다. 하지만 여백이 있는 관계는 충돌해도 다시 회복된다.

‘차이’와 ‘다름’은 다르다. 차이는 사실의 영역이고, 다름은 태도의 영역이다. 차이는 객관적 구분이고, 다름은 주관적 인식이다. 차이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고, 다름은 관용해야 할 상대다. 나는 나와 차이 나는 사람을 수없이 만났다. 아는 것에서, 가진 것에서, 지위와 권력 면에서, 그리고 인격적으로 나보다 우월하고 우위에 있는 사람을 많이 만났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주눅 들고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으며, 시기와 질투의 감정도 올라왔다. 그만큼 차이는 불편했다. 하지만 이는 엄연한 현실로, 내가 노력해서 돌파해야 했다. 나는 차이 나는 상대를 만날수록 성장했다. 내게는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성장의 과정이었다.

다름을 인정하는 건 다르다. 관대함이 아니라 성숙이다. 그 성숙은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는다. 여러 번의 오해와 불편, 충돌을 통과해야만 생긴다. 그저 견디고 받아들여야 한다. ‘너는 나와 다르구나.’ 이 말은 상대를 밀어내는 말이 아니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선언이다.

살다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돼’, ‘어떻게 저런 생각을 다 하지?’ 싶은 사람을 만난다. 정치적 견해가 다를 수 있고, 일하는 방식이나 감정 표현이 다를 수도 있다. 나와 너무 달라서 이해하기 어렵고, 불쾌한 수준을 넘어 분노를 유발하기까지 한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틀렸다’라고 단정 짓는다.

다름을 인정하는 건 쉽지 않다.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다. 내 이익과 입장을 지키면서 상대를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학교에서부터 다양성 존중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공유함으로써 편견과 혐오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차별을 철폐하는 정책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개개인이 누군가 낯선 행동을 할 때 즉각 판단하지 않고 ‘나와 다르지만, 그래도 괜찮다’라고 관용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결혼 초기에는 외출할 때마다 아내와 티격태격하기 일쑤였다. 아내는 “잠깐만, 지금 내려가” 하며 시간을 끌기 일쑤였고, 나는 그런 아내를 주차장에서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나는 집을 나서려 하면 뭔가 빠트린 것 같아서 다시 확인하게 돼”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 깨달았다. 아내는 게으름을 피우는 게 아니었다. 기다리는 나를 무시해서도 아니었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어서 그랬다.

심리학의 거두인 칼 융은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성숙의 시작이다”라면서 “인간관계의 성숙은 다름으로 차별하지 않는 데서 완성된다”라고 했다. 다름은 우리를 확장한다. 똑같은 사람들 사이에선 배움이 일어날 수 없다. 나와 다른 의견, 다른 취향, 다른 세계를 접할 때 우리는 넓어진다. 인간관계의 성숙 또한 닮은 데서 오는 친밀함이 아니라 다름을 견디는 힘에서 비롯한다. 내가 옳다고 믿는 세상 밖에도 얼마든지 다른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우리의 세계는 확장되고, 우리는 공존할 수 있으며, 우리의 관계가 편안해진다.

나이 들수록 느낀다. 인간관계란 결국 비슷한 사람을 찾는 일을 넘어 다른 사람과도 함께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과정이라는 걸 말이다.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늘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세상과 연결된 채로 살아갈 수 있다. 다름을 인정하는 용기, 그게 어른의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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