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말에 중심 잃으면
자신의 가치 순식간에 사라져
일에 대한 열정·초심 되새기며
묵묵히 정진해갈 뚝심 가져야
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깊이에의 강요’에 수록, 김인순 옮김, 열린책들)
다른 일도 그렇지만 예술 분야에서 작품에 대해 남들이 하는 말, 특히 그 분야의 전문가나 평론가가 하는 말은 은근히 신경 쓰이고 긴장도 된다. 소설을 발표하고도 그거 좋은데요, 라는 말은 내 경험으로는 한 손에 꼽을 정도이고 대체로는 아무런 말을 듣지 못한 시간이 길었다. 내 소설에 어떤 문제가 있나, 내가 소설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맞나, 하는 무겁고 회의적인 질문이 떠나질 않는다. 예전에 어떤 자리에서 평론가가 지나가는 투로 나에게 아직도 소설을 공부해서 써요?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그 말이 상처로 남았는데 그 속내가 마치 당신은 글쓰기에 재능이 없다는 소리같이 들려서 내 작업에 대한 가치를 순식간에 상실했기 때문이다.
소묘를 뛰어나게 잘 그리는 어느 젊은 여인이 전시회를 열었다. 그림을 둘러본 평론가가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 작품에는 재능이 보이고 마음에도 와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그녀는 무시하려고 했으나 막상 그 평론가의 비평이 신문에 실리자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직 깊이가 없다는 말 때문에. 그런데 ‘깊이’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작품에 깊이가 생길까? 평론가에게 한 번 깊이가 뭐냐고 당당하게 물어봤으면 좋았을 텐데. 혼란스러운 채 그녀는 초대받은 자리에 가서 등을 돌린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역시 작품이 나쁘지는 않은데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는 말. 그녀는 깊이 있는 그림을 그리려고 애써보았다. 어떤 선을 그리든 어설퍼 보였고 자신의 눈에도 너무 깊이가 없어 보였다. 서점에 가서 가장 깊이 있는 책 한 권을 달라고 하자 점원이 한 철학자의 책을 주었으나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점점 더 그림을 그리지 않고,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깊이가 없어, 나는 깊이가 없는 예술가야라는 자책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한때 소묘를 뛰어나게 잘 그려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던 그녀는 이제 어떻게 될까? 90년대 ‘좀머 씨 이야기’와 ‘향수’로 수많은 독자를 사로잡았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독자의 감정을 환히 꿰뚫어 보고 있다. 어떻게 안타까워하고 감정 이입하게 만들지. 그래서 이 짧은 단편을 읽는 동안 독자는 그녀에게 저절로 이런 말을 하게 된다. 아니에요, 그냥 당신 그림을 그리면 돼요, 그냥 당신의 길을 가면 돼요, 당신의 존재 가치는 당신이 만들면 되는 거예요. 누구도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없다.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 그 말을 해주기에는 이미 내면의 힘도 정체성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다. 깊이가 없다는 남의 말, 남의 시선 때문에.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가십거리가 되었고 그녀의 그림에 처음 깊이가 없다고 평한 평론가는 예전의 비평을 뒤바꾸었다. 재능 있는 그녀의 그림에는 “삶을 파헤치고자 하는 열정, ‘깊이에의 강요’를 읽을 수 있다”라고. 모순과 희극이 뒤섞여 있는 이 단편은 어떤 일에 깊이를 강요하고 강요당하는 통념을 극대화해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거의 삼십 년 만에 이 소설을 다시 읽었는데 감정이 조금 복잡해졌다. 오래전 소설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소설에 완성도나 깊이가 꼭 필요하냐고.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내가 한 대답을 지금은 이렇게 수정하고 싶다. 완성도도 깊이도 모두 주관적인 취향이니 그 글 안에 무언가 생동하는 요소가 있으면 된 거라고. 그 글을 써야 하는 이유와 쓰는 사람 외에 한 사람의 독자만이라도 끌어들일 수 있는 연결성이 있으면 된 거라고. 깊이와 완성도에 대한 강박은 밖에서도 오지만 내면에 숨어 있는 것도 같다. 그것은 약해질 때 불쑥 튀어 올라 우리의 의지를 흔들곤 한다. 그런 순간을 얼른 알아차리곤 첫 마음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지금 하는 일을 자신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시작하고 싶었는지를 떠올리고 다시 묻기. 그래야 흔들리지 않을 수 있고 묵묵히 지속할 수 있지 않을까. 깊이에 대해서가 아니라 진심에 대해 질문하면서.
조경란 소설가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