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봄, 혜화역 근처 나의 사무실에서 김영식 작가를 만났다.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서로 전했다. 헤어질 때, 망우리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자주 찾아오라고 했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몇 개월 후인 8월에 나는 81세로 세상을 떠났기에 그것이 김 작가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어 버렸다. 그는 2007년 11월 나를 찾아와 내 부친(유상규, 1897~1936)과 도산 선생에 관한 인연을 취재하여 '신동아' 2008년 2월호에 '도산 안창호와 태허 유상규'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도산 선생 뒤로 부친을 포함한 3명의 비서가 서 있는 유품 사진도 그에게 건네 세상에 처음 선보였다.
부친은 평북 강계 출신으로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전 1기생(1916)으로 입학했다. 동기는 백병원의 설립자 백인제다. 같은 흥사단 단원이고 부친의 사촌 여동생과 결혼했다. 훗날 일본인이 운영하던 병원을 넘겨받아 함께 운영하기로 했는데, 부친이 40세에 급서하는 바람에 백인제 선생이 혼자 인수했다. 부친이 더 오래 사셨다면 유 & 백 병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부친은 3학년 때 3.1운동 경성의전의 시위를 주도하고 곧바로 상해로 망명했다.

이미륵(1899~1950)의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나온 내용인데, 경의전 1년 후배(혹은 동기) 이미륵에게 시위 참가를 권한 ‘상규’가 바로 부친 유상규다.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 서리 겸 내무총장인 도산 선생의 비서가 된 부친은 선생과 부자지간과 다름없는 관계를 맺었다. 도산이 1923년 임시정부를 떠나자, 부친도 귀국하여 경성의전에 복학하여 동기보다 7년 늦게 졸업(1927)한 후 경성의전 강사와 부속병원 의사로 근무하면서 의학계몽의 글을 쓰고 조선의사회 창립에도 주도적으로 관여했으며 수양동우회의 핵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환자 치료 중 세균 감염증으로 별세하여 망우리로 왔다.
나는 공군 시설감(준장)으로 제대한 후 부친의 임시정부 관련 자료를 찾아 제출하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서훈을 받았다. 3.1운동 때 체포되지 않아 일경의 조서가 없어 3.1운동의 공적은 포함되지 않았다. 1998년 묘 입구에 연보비가 세워졌다. 그때는 부친의 유고를 미처 찾지 못해 '도산 안창호'(이광수)에 나온 글을 알려줬다.
“도산의 우정을 그대로 배운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유상규였다. 유상규는 상해에서 도산을 위하여 도산의 아들 모양으로 헌신적으로 힘을 썼다”라는 내용이다.

2007년 11월 김 작가를 만났을 때 나눈 대화 중에 다음의 내용이 기억에 남았다.
“마침, 타이밍이 좋소. 몇 년 동안 부친에 관한 자료를 모아 조만간 출간할 예정이고, 또 지난주에 보훈처에서 연락이 와서 현충원 이장 순서가 되었으니 준비하라고 하던데….”
그러자 김 작가는 좀 놀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 그런가요? 그런데, 선생님. 혹시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38년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나를 평남 강서군 선산에 묻지 말고 망우리 유상규 군 옆에 묻어달라고 한 글을 보신 적이 있나요? '삼천리' 잡지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글쎄요, 그런 말은 들은 기억이 있는 것도 같은데, 자료를 본 적은 없소”
“제가 내일 보내드리죠. 선생님, 이장하시면 물론 영예로운 일이고 나라가 관리해 주니 그것도 좋긴 하죠. 그런데 도산 선생이 30년 이상 옆에 계시다가 도산공원으로 떠나셨는데, 부친마저 그 자리를 떠나가신다면, 두 분은 이제 영원히 이별하시는 게 아닐까요?”

다음 날 아침 김 작가가 이메일로 보내준 '삼천리'(1938년 5월호, 도산의 유언) 자료에 그런 내용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때 내 나이 75세, 부친을 현충원으로 모시는 일이 아버님에 대한 나의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4살 때 모친을 따라가 임종 전의 도산 선생을 찾아뵌 적이 있고, 경기고 다닐 때 도산 선생의 묘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그리고 내 이름 유옹섭의 옹(翁)은 도산 선생의 다른 아호 ‘산옹(山翁)’에서 따온 것임을 나중에 알았다. 그래서 부친의 묘를 벌초할 때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도산 선생의 묘터도 벌초했는데, 그런 사연이 글로 남아 있었다는 것까지는 몰랐다.
아무래도 부친에게는 망우리 그 자리가 가장 좋지 않을까. 며칠 후 보훈처에 이장 취소의 의사를 전하고 김 작가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이후, 부친의 자료를 정리해 '태허 유상규'(2011)를 출간하고, 도산 묘터의 성역화를 위해서도 노력했다. 묘터이지만 민족의 큰 위인이 있던 자리가 아무도 돌보지 않아 넝쿨로 뒤덮여 있을 수는 없다. 2011년 도산 선생의 큰따님 안수산 여사(1915~2015)로부터 “my wish now is to restore the Manguri site in honor of my father(부친을 기리기 위해 망우리 터를 복구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아 서울시에 제출했다. 그러나 “좋은 일이긴 하지만 지금은 예산이 없다”라는 회신을 받았다. 나의 사비로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일은 사회의 공적 사업으로 이루어져야 하기에 이제나저제나 훗날을 기다리다 2014년 8월 나는 하늘로 왔다.

그 후, 김 작가는 나의 유지를 이어받아 도산 묘터의 복원 방안을 늘 염두에 두었다. 그는 2015년 봄 강남의 도산공원을 찾아갔다가 도산기념관 지하 한구석에 큰 비석이 놓여 있는 것 을 보았다.
망우리에 1955년 세워져 1973년에 이전된 비석이었다. 묘 앞으로 가보니 한글로 된 새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부인 이혜련 여사가 훗날 합장되어 새로 비석을 세우면서 쓸모가 없어진 구비를 보관하고 있다고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이 말했다. 아마 비문을 지은 춘원 이광수의 친일 논란이 원인이 되었던 것도 같다.
2015년 5월, 김 작가는 (사)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분과위원장의 자격으로 서울시에 구비를 망우리로 다시 이전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내셔널트러스트의 김금호 국장이 흥사단과 도산기념사업회, 서울시설공단(이사장 오성규)과의 교섭에 큰 힘을 보탰다. 하늘의 도산 선생도 도우셨는지 무난하게 일이 진행되었다. 2016년 2월 26일 도산공원에서 망우리공원으로의 이전 작업이 완료되고 2016년 3월 1일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관계자 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금호 국장이 사회를 맡아 김영식 작가의 경과보고, 한철수 시인의 비문 봉독 등이 이어졌고 모두는 큰소리로 도산이 작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애국가를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곡조로 4절까지 불렀다. 이후, 흥사단원을 비롯하여 망우리 도산의 비석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다시 몇 년 후에는 흥사단 원로들의 청원으로 봉분(허묘)을 새로 만들고 비석을 우측으로 옮겼다. 옛날처럼 넝쿨로 묘역에 뒤덮이는 일은 더 이상 없게 되었다.

비석은 오석(烏石. 검은 화강암)으로 높이 2.6m, 사각의 받침대가 있고 지붕을 쓴 모양이다. 비문은 춘원 이광수가 납북 전에 미리 지어 놓았던 것이고 글씨는 흥사단원이기도 한 원곡 김기승이 썼다. 앞면의 글은 소전 손재형이 전서체로 썼다. 한가운데에 '島山安昌浩先生之 墓(도산안창호선생지묘)'라 쓰고 좌우로 한시가 적혀 있다. 비석 옆에 번역문이 적혀 있는 돌판이 있었는데, 이것은 아직 도산기념관에 남아 있는 듯하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배우고 가르침에 끊임없이 애쓰시고, 슬기와 큰 덕을 바로 세워 사심은 우리나라와 겨레를 위함이셨네. 바르고 사심 없이 사람을 대함에 봄바람 같고, 일을 행하심에 가을 서릿발 같으셨네” 도산 선생의 유해는 1973년 도산공원으로 이장되었지만, 선생의 피와 살은 이 땅에 스며들어 있기에 묘터는 소중하다.

비록 유해는 돌아오지 못했지만, 아버님은 43년 만에 다시 돌아 온 비석을 도산 선생 대신으로 여기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도 묘역은 초라하다. 지금의 봉분은 잔디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해 흉한 모습일 때가 많다. 민족의 큰 위인, 도산 선생의 격에 맞지 않는다. 봉분 대신에 무언가 돌로 된 조각 품으로 만들고 주변도 깔끔하게 새로 정비해야 하지 않을까. 김 작가는 이 글도 쓰면서 망우리의 도산 선생과 아버님의 인연을 세상에 계속 전하고 있다.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이 여기 찾아와 사람 간의 소중한 정의 이야기를 보고 느꼈으면 하고, 또 도산 선생이 고매한 인격으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고 하는데 바로 그 증거를 여기에서 찾았으면 한다.
[ 경기신문 = 우경오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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