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아래 마동에 자리 잡은 새등이요가 있다. 새등이는 ‘해를 가장 먼저 맞는 동쪽의 언덕’이라는 우리말이라고 했다. 무초 최차란 선생님이 30여 년 동안 지켜오던 요를 20여 년 전 원불교에 희사했다. 그릇은 모두 장작가마에서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발물레를 사용하고 자연 유약에 4박 5일 동안 장작가마에 불을 땐다. 전통 방식의 고된 노동을 지금은 제자인 최현천 교무님이 일 수행을 하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 집 그릇들은 대부분 새등이요에서 왔다. 화려하지 않지만 쓸수록 정감이 가는 그릇들이다. 만든 분을 닮았다.
벗이 올해 결혼했다. 결혼 선물로 무엇이 좋을까 고민하던 중 다기가 떠올랐다. 부부에게 대화와 쉼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다기 세트를 선물로 주고 싶었다. 그 핑계로 함께 새등이요를 찾았다. 서너 해 만에 뵙는 교무님의 얼굴에서 무상을 직면한다. 모친과 동갑인 교무님도 이제 환갑이 넘었다. 초등학생 시절 원불교 여름 캠프에서 처음 뵌 교무님의 젊은 얼굴은 온데간데없다. 절뚝이는 걸음이지만 그래도 환한 얼굴로 맞아주며 차를 내어주신다.
차담을 나눈다. 최 교무님은 겨우내 필요한 장작을 쌓아두느라 고된 톱질에 다리 통증을 얻었다고 했다. 벗과 필자가 만나게 된 이야기, 우리를 끈끈하게 했던 지리산 종주의 추억, 벗의 결혼과 남편 이야기 등을 나눈다. 대화 중 교무님의 전화기가 거듭 울린다. 같은 방을 쓰던 70대 교무님이 폐에 물이 차는 현상으로 병상에 있다고 했다. 원인을 찾지 못해 큰 병원으로 갔지만 서울의 병원에서 제대로 된 진료를 받는 일이 쉽지 않아 다른 방편을 찾고 있다 했다. 병원에 의사는 부족하고, 환자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고 했다. 어서 쾌차하길 바라는 것 말고는 해드릴 것이 없어 안타까웠다. 무탈하게 일상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다시금 깨닫는다.
새등이요를 거쳐 토함산에 갈 요량으로 우리는 등산복 차림이었다. 하지만 차담에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찻자리를 정리하고 벗이 원하는 다기를 고르러 전시장에 갔다. 교무님이 다기 세트를 권해주었다. 벗은 온전히 흔쾌히 그 도자기를 마음에 들어 했다. 오동나무 상자에 다기를 곱게 싸주신다. “내가 벼룩의 간을 빼먹지.”하며 턱없는 금액만 달라하신다. 말씀하신 금액보다 10만 원을 더 드렸다. 그것도 노고에 비하면 부끄럽고 부끄럽다.
벗에게 선물하는 마음이 곱다며 선물을 주고 싶다고 하신다. 그릇을 막 집어 오신다. 굽이 달린 접시, 작은 접시, 큰 접시, 국그릇, 밥그릇, 머그잔에 화병까지… 한사코 말려도 절뚝이는 걸음으로 아득바득 싸주신다. 그릇을 신문지에 싸는 교무님의 손에 그릇들이 만들어진 과정이 새겨져 있다. 새로운 큰 종이 박스 안에는 신접살림이 가득이다. “이거는 내가 주는 결혼 선물이여.”하신다. 벗은 나오는 길에 “언니, 나 이걸 그냥 받아도 돼?”하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우리가 받은 것은 도자기지만 정작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글이나 말로 설명하기 힘든 큰 마음이다.
조건 없이 받는 환대와 친절은 때때로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의 뭉클함이 있다. 송구함과 감사함을 넘어 뜨거운 따뜻함이 있다. 우리는 그 따뜻함을 안고 토함산으로 향했다. 석굴암 주차장에 당도하니 탁 트여 바람이 매섭다. 해가 수평으로 보인다. 우리는 걸음을 서두른다. 신년맞이 소원 성취등 접수 현수막이 입구에 붙었다. 석굴암으로 향하는 길에도 알록달록 연등이 즐비하다.
석굴암에 당도해 아래를 내려다보니 경내 마당에 소원등이 그득하다. 알록달록 소원등 너머로 해가 어스름 넘어간다. 석굴암에 들어가 불상을 본다. 종교는 없지만 그래도 간절히 빌어본다. 최 교무님의 다리 통증이 거둬지길, 70대 룸메이트 교무님의 쾌차 그리고 모두의 평안을 간절한 염원을 담아 빈다. 고개를 들어 부처님의 얼굴을 바라보니 빙그레 미소를 지으시는 것 같다. 몸은 추워도 따뜻한 마음으로 우리는 점차 어둑해지는 길을 돌아 나온다.
노진경 시민기자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