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하고 신비한 불꽃

2024-12-26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내려왔는데

발목을 삐끗하지 않았다

오늘은 이런 것이 신기하다

불행이 어디 쉬운 줄 아니

버스는 제시간에 도착했지만

또 늦은 건 나다

하필 그때 크래커와 비스킷의 차이를 검색하느라

두 번의 여름을 흘려보냈다

사실은 비 오는 날만 골라 방류했다

다 들킬 거면서

정거장의 마음 같은 건 왜 궁금한지

지척과 기척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

장작을 태우면 장작이 탄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오래 불을 바라보던 저녁이 있다

그 불이 장작만 태웠더라면 좋았을걸

바람이 불을 돕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솥이 끓고

솥이 끓고

세상 모든 펄펄의 리듬 앞에서

나는 자꾸 버스를 놓치는 사람이 된다

신비로워, 딱따구리의 부리

쌀을 세는 단위가 하필 ‘톨’인 이유

잔물결이라는 말

솥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신기를 신비로 바꿔 말하는 연습을 하며 솥을 지킨다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

내겐 그것이 중요하다

-시 ‘굉장한 삶’, 안희연 시집 <당근밭 걷기>

“장작을 태우면 장작이 탄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오래 불을 바라보”는 날이 요새 많다. 자루에 담아둔 낙엽 몇 줌 넣고 가는 나뭇가지를 얼기설기 올려 불을 붙인다. 무쇠솥 달구는 잉걸불도 구겨진 신문지 쪼가리에서 시작된다는 걸 눈보라 치는 아궁이 앞에서 배운다. 소리 없이 오래 타는 참나무도 저 혼자는 불붙지 못한다. 마른 대나무들이 펑펑 터지며 불을 살리고, 쉬이익 두꺼운 장작 속으로 가열차게 들어가는 리듬이 놀랍고 신비하다. 세찬 냉기를 이기며 서로를 불 속으로 불러들인다. 새의 깃털과 고양이, 강아지의 털도 섞여 있겠다.

동학혁명 130주년인 2024년 동짓달에 전봉준투쟁단을 필두로 “신기를 신비로 바꿔”버린 굉장한 일이 출현했다. “한 개의 낱알이 160개의 알곡이 되는 일보다 놀라웠다”는 기적은 12월21일 남태령에서 일어났다. 경찰의 차벽에 저지된 트랙터 상경 농민들 곁에 와서 응원해주고 싸워주고 “떠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준 2030 여성들에게서 농민들은 놀라운 희망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그 추운 밤, 외롭고 비감한 농민들 “지척”에서 함께 보낸 사람들은 “크래커와 비스킷의 차이를 검색하느라” 버스에 늦거나,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내려왔는데 발목을 삐끗하지 않았다”는 것에 신기해하고 안도하며, “정거장의 마음”을 궁금해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때로 소심하고 섬세한 젊은이들이었을지 모른다.

익명의 단수는 거리와 광장에서 영역을 가로지르며 복수의 목소리가 되었다. 갚을 수 없는 빚을 떠안은 채 생계의 위태로움과 불안정성과 차별화의 극대치를 견뎌온 사람들은 거대한 합창으로 다른 세계를 요구했다. 이 땅의 농민들 수입이 1년에 1000만원도 안 된다는 걸 몰라도 달려왔겠다. 사적 영역을 뛰어넘어 연대하는 신체들은, 내용은 무겁지만 밝은 형식으로 공정을 자처하는 정부에 명령했다. “벼를 계속 재배하는 것은 미래세대에게 큰 짐을 지”운다며, 정부가 농민을 모독하고 폄하하면서 죄인 취급하며 갈라치기해도 그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나라는 2030 여성을 버렸지만 2030 여성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왔다”는 청년들을 보고, “나는 저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 농사를 더 열심히 짓고 싶어졌다” 말하는 트랙터 시위대 일원인 강경석씨의 말에 나도 더 열심히 살고 싶어진다. 젖은 장작들이 본격적으로 타들어간다. 잊지 말 일이다. 뜨거운 금빛 혀와 풀어헤친 머리카락 사이 푸르게 빛나던 불의 눈물방울과 불쏘시개들의 소신공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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