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칼럼] 한인 이재민들의 먹먹한 아픔

2025-01-27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엄마와 찍은 사진도 산불로 다 잃어버렸어요. 엄마가 만들어 줬던 선물, 사진을 다시는 만져볼 수가 없네요. 기억력이 안 좋은 제게는 꼭 필요하거든요.”

이튼(Eaton) 산불로 단독주택이 전소된 리즈 오씨는 목이 메었다. 담담하게 산불 피해 소식을 전하던 오씨는 다시는 볼 수 없는 엄마의 사진마저 영영 사라졌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어했다. “지금 일어난 모든 일이 진짜인지 비현실 같다”는 말을 반복하는 모습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과 아픔이 묻어나왔다.

새해 초 LA 지역에서 발생한 팰리세이즈(Palisades) 산불, 이튼 산불, 허스트(Hurst) 산불은 이재민 수만 명과 가족에게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흉터는 쉽게 아물 것 같지 않다.

피해는 할리우드 재난영화보다 더 가혹한 현실이 됐다. 팰리세이즈와 이튼 산불로 최소 28명이 목숨을 잃었고, 주택 등 건물 1만6000채 이상이 불에 탔다. 산불이 잡히고 복구가 시작됐지만, 한인 등 이재민은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고 토로한다.

기부웹사이트 ‘고펀드미’에 올라온 한인 이재민 사연은 먹먹하다. 이민 후 알타데나에 터를 잡은 윤모(80대)씨 노부부는 30년 가까이 산 집을 잃었다. 대피령이 떨어진 뒤 2~3일 뒤면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윤씨 노부부는 망연자실한 상황이다.

20대 중반에 영어 한마디도 모른 채 LA로 이민 온 60대 한인 부부는 알타데나 세탁소를 잃었다. 이들 부부는 식당 설거지, 소매점 의류 운반, 청소로 돈을 모아 세탁소를 차렸다. 25년 삶의 전부였던 세탁소는 잿더미가 됐다.

이재민들은 재산 피해를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당장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충격에 아파한다. 특히 삶의 모든 추억이 깃든 소중한 물건과 장소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사실 올겨울 남가주 지역은 산불이 발화하는 데 최상의 조건에 놓인 상태였다. 지난 7월 이후 비가 거의 오지 않은 극심한 가뭄이 계속됐다. 태평양 적도 지역이 대체로 차가운 해수면 온도를 유지하면서 건조하고 따뜻한 겨울을 유발하는 라니냐 현상도 겹쳤다. 예년과 다른 ‘마른 우기’를 보내던 중 최대 풍속 80~100마일에 달하는 샌타애나 강풍은 기어이 화마로 돌변했다. 샌타애나 강풍은 네바다주와 유타주 사막 지역에서 불어오는 건조하고 따뜻한 바람이다. 엔젤레스 국유림 등 산간지역이 산불에 극도로 취약한 상환이었다고 한다. 샌타애나 강풍은 메마른 나뭇가지 등 마찰력을 키우고, 전신주 등에 피해를 끼쳐 자연발화를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상의 날씨를 자랑했던 천사의 도시마저 이상기후 현상에 직면했다. 이번 대형 산불은 재난을 항상 대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당장 이재민들은 보험사와 보상을 놓고 씨름하며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주택보험 가입자 중 산불 등 자연재해 피해보상이 약관에 없는 이재민도 있다. 이재민 중 주소가 산불 위험지역(Brush Area)이라는 이유로 주택보험 갱신이 거부된 이도 있다.

보험업계는 이번 재난을 계기로 주택 소유주에게 현재 가입한 보험 약관 숙지를 당부했다. 한 에이전트는 “보험에 가입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입 목적에 맞게 피해보상 항목을 제대로 선택했는지 여부”라며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보상, 대피 기간 숙박비 보상, 미술품 및 귀중품 보상, 현금분실 보상 여부 등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재민이 된 리즈 오씨는 “보험사가 화재 보상은 안 된다고 통보할 때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보장하는 캘리포니아 페어플랜이 구세주가 됐다며 그나마 안도했다.

김형재 / 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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