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율 대만병, 저성장 일본병…한국은 둘 합친 합병증 앓는다 [신 재코타 시대]

2025-12-10

TSMC를 중심으로 눈부신 수출 성장을 이뤄내고 있는 대만. 하지만 들여다보면 수출 중심 경제의 여러 부작용을 앓고 있다. 대만은 수출 경쟁력을 지키기 위해 장기간 고환율과 저임금을 용인해 왔고, 그 결과 수입물가는 뛰고 임금은 제자리이면서 국민의 생활 수준은 크게 개선되지 못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최근 ‘대만병(Taiwanese disease)’이라 명명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고환율과 저성장을 동시에 겪고 있는 최근 한국 경제가 대만의 경험에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고 강조한다.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지는 최근 “대만화 약세는 대만의 수출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지만, 동시에 큰 왜곡을 만들어냈다”며 “대만의 경상수지 흑자는 비대해졌고 외환보유액은 쌓였지만 집값은 폭등했고 국민들은 상대적으로 가난해졌다”고 지적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수출 경쟁력을 지키기 위해 대만 국민의 생활수준을 희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며 "통화 가치를 낮게 유지하면 수출기업에는 보조금을 주는 효과가 있지만, 수입기업에는 그만큼 부담을 준다. 식품과 연료(자동차·발전용)를 대부분 수입하는 대만에서는 이 구조가 사실상 저소득 가계에서 수출기업의 소유주와 종사자들에게로 부를 이전시키는 셈"이라고 짚었다.

부동산 가격 급등 역시 뒤따른 대표적인 부작용이다. 글로벌 물가 비교 플랫폼 넘베오(NUMBEO)에 따르면 대만 수도 타이베이의 부동산 구매력 지수(PIR)는 34.3년으로, 이는 평균적인 타이베이 주택 가격이 현지 임금의 34배에 달한다는 의미다. 집값이 비싸기로 유명한 도쿄(15.2배)의 두 배를 넘을 뿐 아니라, 최근 주택가격이 급등한 서울(26.1년)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강준영 한국외대 중국학과 교수는 “대만은 수출 경쟁력을 위해 낮은 임금을 유지해 왔지만, 정책실패에 더해 수입물가와 일정 부분 연동되어 주택가격은 빠르게 치솟았다”며 “또한 저평가된 통화 가치 때문에 외국인 입장에서는 대만 부동산이 상대적으로 싸 보이면서 해외 투자자 자금이 유입돼 가격 상승을 부추긴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이런 고환율(통화가치 약세)이 초래한 ‘대만병’에 한국의 면역력이 약하다는 점이다. DB증권이 최근 발표한 ‘통화절하가 가져올 한국의 미래, 대만’ 보고서에서 “통화 절하는 본질적으로 가계의 구매력을 희생해 수출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효과와 같다”며 “기업이 이를 국내에 재투자한다면 성장으로 이어지겠지만, 현재는 미국 등 해외로 생산 거점을 옮기는 ‘산업 공동화’가 진행되고 있다”며 한국이 대만을 따라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보고서를 쓴 문홍철 DB증권 연구원은 "한국은 최근 고환율 상황도 문제지만, 관세협상 등으로 해외 공장을 더 많이 짓게 되면 수출로 벌어 들인 기업 이익이 국내에 머물지 않게 될 산업공동화가 더 큰 위험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대만 폭스콘은 애플을 위해 만드는 아이폰의 대부분을 중국 공장에서 만든다. 롄화전자(UMC) 역시 일본·중국·싱가포르 등 여러 나라에 생산 시설을 확대해 왔다.

산업공동화는 대만의 저임금 문제도 불러왔다. DB증권 자료에 따르면 대만의 대졸 초임임금은 149만원으로 한국 306만원의 절반에 불과하다. 대만은 수출기업의 경쟁력을 위해 저임금 저물가 구조를 오랜시간 유지해왔다. 최근 TSMC 등 일부 기업 중심으로 임금이 올랐지만, 다른 일자리까지 온기가 번지지 못하고 있다. 김천구 대한상의(SGI) 연구위원은 "한국도 대졸 초임이 높다지만 이중구조가 심각해 소수만 좋은 일자리에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며 "대만처럼 산업공동화가 심해지면 '좋은 일자리로 들어가는 문'은 더 좁아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윤수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대만의 통화 약세는 정책적으로 의도된 측면이 있고, 외환보유액도 충분하며 수출 성장세도 높아 통화가치를 올릴 여력이 있다”며 “반면 최근 한국의 고환율은 의도되지 않은 구조적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라 상황이 더 나쁘다고 판단된다”고 우려했다.

한국이 저성장·고령화라는 ‘일본병’과 수출 중심 고환율 구조인 ‘대만병’을 동시에 겪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대만은 올해 7% 성장을 기록할 정도로 높은 성장세를 보이는 반면, 한국은 일본처럼 1~2%대 저성장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병’은 1990년대 초 버블 붕괴 이후 약 30년 동안 지속된 저성장·디플레이션 현상을 의미한다. 당시 저출산·고령화까지 겹친 일본은 생산인구 감소와 내수 부진으로 성장 동력이 약화하면서 장기 침체의 늪에 빠졌다.

강준영 교수는 “한국은 이미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라 불렸던 저성장 국면의 초입에 들어섰고, 대만처럼 수출 중심 구조로 인해 내수 기반이 약해지면서 복합적인 어려움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일본은 내수가 탄탄하고 대만은 고성장이 뒷받침되고 있지만, 한국은 두 조건을 모두 갖추지 못해 상황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합병증 우려에 대한 해법으로, 수출 경쟁력을 지키되 내수가 무너지지 않게 기업과 공장을 국내에 붙잡아 두는 것을 공통적으로 강조했다. 이윤수 교수는 “한국이 미국이 아닌 국내에서 사람을 고용하고 공장을 지을 만한 충분한 매력을 제시해야 할 시점”이라며 “기업에 여러가지 혜택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정책 불확실성을 줄이는게 필요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첨단 기술뿐 아니라 제조업과 원천기술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강 교수는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탄탄한 기초 기술을 보유한 제조 기업들이 버팀목이 되었기 때문”이라며 “한국은 대만과 달리 반도체 외에도 조선·화학·철강 등 경쟁력 있는 제조업 기반을 폭넓게 갖춘 것이 강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첨단 산업뿐만 아니라 이러한 전통 제조업이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국가가 사업 재편 등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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