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軍 지휘부 만난 영국 국왕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2025-03-25

19세기 후반 세계 패권국으로 부상한 영국은 20세기 들어 1904년 프랑스와 영·불 협상(앙탕트 코르디알)을 체결했다. 유럽의 신흥 강국 독일이 세계 도처에서 영국과 충돌하며 호시탐탐 패권국 지위를 노렸기 때문이다. 1871년 독일과의 전쟁에 패하며 알자스·로렌을 독일에 빼앗긴 프랑스로선 실지 회복을 위해 영국 같은 강력한 파트너가 꼭 필요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동맹으로서 독일에 맞서 싸웠다. 4년 넘는 전쟁 기간 독일은 200만명, 프랑스는 130만명, 영국은 90만명 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전쟁 막판에 프랑스·영국 편에서 참전한 미국도 10만명 넘는 장병이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엄청난 희생을 치른 끝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의 항복을 받아내고 1차대전 승전국이 되었다.

1930년대 들어 독일에서 나치와 아돌프 히틀러 총통이 정권을 잡으며 유럽에 다시 전운이 감돌았다. 훗날 영국 총리에 오른 윈스턴 처칠은 1차대전 때의 경험을 토대로 ‘세계 최강의 해군을 지닌 영국과 막강한 육군을 보유한 프랑스가 손을 잡으면 독일을 물리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1939년 9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략하고 이에 영국·프랑스가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런데 이듬해인 1940년 6월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항복하고 만다. 처칠이 그토록 높이 평가한 프랑스 육군이 독일 육군과의 대결에서 패전을 거듭한 결과였다. 이후 소련(현 러시아)과 미국이 영국 편에서 참전하며 전세가 뒤바뀌었고, 결국 1945년 나치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이 끝난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2차대전을 겪으며 프랑스를 대하는 영국의 태도는 확연히 달라졌다. 처칠은 전쟁 막바지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랑스군을 대놓고 “약체”라고 비웃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저항군) 지도자이자 훗날 프랑스 대통령에 오른 샤를 드골 장군과 만난 자리에선 “대양(대서양)과 대륙(유럽) 중 택일하라면 주저 없이 대양을 택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영국의 주권과 독립이 위협을 받는 경우 프랑스와 협의하는 대신 대서양 건너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영국은 2차대전 종전 후 미국과 이른바 ‘특수 관계’(special relationship)를 맺고 안보를 미국에 의존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프랑스는 반발했다. 드골은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유럽연합 전신) 가입 신청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24일 런던 교외 윈저궁에서 영국군 및 프랑스군 지휘부를 접견했다. 이는 티에리 부르크하르트 국방참모총장(육군 대장)을 대표로 하는 프랑스군 지휘부가 이날 런던을 방문해 영국군 지휘부와 회동한 데 따른 것이다.

토니 라다킨 영국 국방참모총장(해군 대장)은 이번 만남에 대해 “영국·프랑스 양국의 군사 협력과 향후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위한 공동의 노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발을 빼려는 기색이 뚜렷하다. 누군가 미국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면 그 책임은 유럽의 강대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 수십년간 미국만 바라본 영국이 다시 프랑스와의 군사 협력으로 시선을 돌린 점이 눈길을 끈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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