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 관세 협상 장기화 등 대내외 불확실성 확대로 원·달러 환율이 5개월 만에 1420원을 돌파하며 한국 경제를 뒤흔들 복병으로 떠올랐다. 10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직전 거래일보다 21.0원 상승한 1421.0원에 마감했다. 장중 1424.5원까지 올라 탄핵 정국으로 정치적 불확실성이 고조됐던 5월 2일 이후 5개월 만에 최고 수준까지 뛰었다. 프랑스 등 유럽 주요국의 재정위기 부각으로 달러화가 강세를 보인 데다 차기 일본 총리로 거론되는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총재가 아베노믹스를 계승할 것이라는 전망에 엔화가 약세를 나타낸 것도 영향을 미쳤다.
환율은 국가의 위상과 신뢰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다. 원화 가치가 다시 탄핵 정국 수준으로 떨어진 것은 한국 경제가 직면한 위기가 어느 정도인지 그대로 보여준다. 현재 우리 경제를 짓누르는 가장 큰 이슈인 한미 관세 협상은 7월 말 타결 이후 세부 협상이 3개월째 교착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노란봉투법, 상법 개정안 등 기업을 옥죄는 법안들이 잇따라 입법되면서 정책 불확실성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원화 가치 하락세가 장기화된다면 수출에는 긍정적일 수 있지만 내수에는 독이다. 우선 원자재·에너지 수입 물가 상승으로 생산 비용이 급증하고 가계 실질 소득이 줄어 소비 위축이 불가피하다. 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다시 2%대로 올라서는 등 물가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수입 물가 상승까지 지속되면 인플레이션 압력이 가속화할 수 있다. 환차손을 우려한 외국인투자가의 급격한 이탈도 우려된다. 이날 코스피가 3610.60으로 마감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지만 글로벌 자금이 언제 갑자기 빠져나가 증시에 찬물을 끼얹을지 알 수 없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는 외환시장 안정에 대한 시그널을 명확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환율은 시장 자율에 맡기되 급격한 쏠림에는 기술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외화 유동성 확보를 위해 한미 통화 스와프 체결을 서두르고 정교한 관세 협상으로 대외 불확실성도 줄여야 할 것이다. 경기 대응은 ‘소비쿠폰’ 같은 단기 부양책보다 펀더멘털 개선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 경제는 믿을 만하다”는 인식을 대외에 분명하게 심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