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칼럼] 나무 한 그루

2024-09-30

강경범 교수의 세상을 보는 눈

[동양뉴스] 맹위를 떨치던 폭염은 추분을 기점으로 가을 태풍과 함께 수마를 남긴 채 한풀 꺾이었다. 다시 출발해도 늦은 것은 결코 없기 때문에 이제 용기 내어 곳곳에 남긴 태풍 피해의 아픈 상흔을 딛고 일어서자. 그러나 지금의 순간은 잊지 말자. 자연 또한 인간에게 순종을 강요당하며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호기심과 탐욕을 뒤로한 채 스스로 스트레스를 줄이고 안정을 꾀하기 위한 나름 선택과 자유 의지를 표현하는 그 만의 치유 방법은 아닐까. 오랜 시간 인간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생태계 내에서 다양한 역할들을 담당하며 생명체의 중요성과 함께 역사와 전통의 균형을 유지하며 산업을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해가 뜨고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인생을 살아오며 똑같은 생각으로 마무리 짓곤 한다. 자연과의 유대관계에 있어 과연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무엇일까 하면서.

폭우로 인해 족히 수십 년은 돼 보이는 오래된 고목이 쓰러져 도로를 덮쳤다. 하지만 시골 동네라도 다행히 진입로가 있기에 고립되지는 않았다. 우산을 받쳐 들고 바라본 고목의 모습은 튼튼한 뿌리가 있음에도 무분별한 삼림의 훼손으로 인하여 희생을 강요당한 인재라는 생각에 멈추어 선다. 돌아선 길에 앞마당 한편에 놓인 소나무 가지를 치며 생각해 보았다. 성경 속 창세기에 등장하는 선악과의 나무는 인간의 도덕적 선택과 자유 의지를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으로 원죄를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종교적 논의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수정, 분만하여 출산하는 인간의 생명력은 모든 조건을 모태 안에서 수용해 주듯 씨앗에서부터 출발하여 적절한 조건이 성사돼야 발아하는 자연의 이치와 서로 부합될 것 같은 생각이다. 씨앗의 껍질이 열리고 어린 나무의 뿌리와 줄기가 자라기 시작하며 햇빛을 받게 되고 본격적인 성장기에 접어든다. 인간 또한 어미의 태로부터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그 순간 환경적 변화와 생리적 변화의 과정을 겪으며 성장기에 들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저울에 달아볼 때 무심코 지날 수 있는 경험일 수도 있겠지만 가지치기를 하며 나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비록 소리 내지는 않을지언정 그 안을 들여다보니 내면에서 들려오는 침묵 소리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외형상 좋게 보이며 비록 그 시작점은 같을지언정 쓸모없이 뻗은 곁가지는 다른 줄기에 피해를 입히며 성장마저 어렵게 하니 근본은 내 안에 있는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나무가 성숙해지면 꽃과 열매를 맺기 시작하듯 인간 또한 생태계에 다양한 상호작용을 통하여 삶을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닌가. 오래전 젊은 날 패기와 실패를 맞보며 잃어버린 시간과 돈을 모두 세상의 탓으로 돌리던 어리석은 짓을 참회하며 반성한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서 마하트마 간디의 “종교란 가지가 무성한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 가지로 보면 그 수가 많지만, 줄기로 보면 단 하나뿐이다. 똑같은 히말라야를 가지고 동쪽에서 보면 이렇고, 서쪽에서 보면 저렇고 할 따름이다.”라는 말을 곱씹는다.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철학적 논의를 배제한 체 어느 날 마당 한편 무성한 한 그루 소나무의 줄기가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에 가지를 치는 고통은 어느 순간 나의 가족으로 다가선다.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마 18:35)”을 생각한다. 세상 보이는 것에 잘 포장되어온 우리네 가정사의 감추어진 진실에 고개를 떨구며 올바른 가지치기를 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진다. 마음 한편을 정리하고자 찾아 나선 슬픈 역사를 간직한 봉곡사. “천년의 숲길” 아름다운 소나무에 비친 햇살 앞에서 지긋이 눈을 감고 한 그루 나무에 삶을 덧칠하니 이제야 평안함이 찾아온다. 그러나 근본은 한곳에 있으되 한 그루 나무의 가지처럼 살아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에 머무른다.

(외부 칼럼은 동양뉴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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