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가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걸까. 지난 12월 10일 출시된 모바일 게임 <모뉴먼트 밸리 3>를 하며 든 생각이다. 전작들이 그러했듯 파스텔 톤의 색감과 공간감을 극대화한 몽롱한 사운드, 마우리스 코르넬리스 에셔의 석판화 ‘오르내리기’, ‘전망대’처럼 착시를 이용해 물리 법칙을 무너뜨리는 환상적 퍼즐은 기대했던 만큼 조화롭고 아름다웠다. 특히 파스텔 평면화의 질감을 거의 그대로 살리고 노골적으로 채색하는 소리까지 덧입힌 ‘오리가타 아뜰리에’ 스테이지는 시리즈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화사한 세계를 구현해낸다. 이토록 인상적인 시청각적 경험이 전작들과 분리되는 건, 바다의 어둠을 밝히는 등대의 빛이 소멸하면서부터다. 한정적이고 파편적인 대화에도 불구하고 스토리텔링과 다른 캐릭터와의 상호작용이 전작보다 훨씬 많이 부각된 이번 작품에서, 빛의 파수꾼 견습생 누어는 빛의 소멸이라는 재해를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상실과 실패를 경험한다. 그럼에도 이 세계는, 등대의 빛이 사라져 수해를 입고 길을 잃고 방황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게 된 이 세계는, 여전히 아름답다. 가령 바다의 범람으로 고립된 자매를 구출하는 ‘일순간의 이별’ 에피소드 초반, 많은 것을 집어삼킨 바다의 빛깔은 여전히 따사로우며 수몰된 건축물들은 위태로운 중에도 여전히 매혹적인 퍼즐로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것뿐이면 좋았겠지만, 게임 제작사도 미처 예측할 수 없던 또 다른 커다란 심리적 걸림돌이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게임이 출시된 건 12월 10일, 12.3 내란 시도에 대한 대통령 탄핵 1차 표결이 무산되고 국민 다수가 분노와 우울에 빠진 시기였다. <모뉴먼트 밸리 3>에 대한 앞서의 질문은 살짝 변주됐다. 폐허에서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는 걸까.
매일 혼란스럽고 자주 추악했던 12월 3일 이후의 모든 시간 동안, 현실을 잠시 잊기에 <모뉴먼트 밸리 3>는 매우 효과적인 처방전이었다. 원래도 짧은 플레이 타임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갈 만큼 이 세계는 엄청난 몰입감을 선사한다. 마치 이 시기를 위해 등장한 선물처럼.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약간의 죄책감 역시 동반한다. 이 혼돈의 시국에 이토록 조화롭고 눈부신 세계에 탐닉해도 되는가. 이에 대한 나름의 해답 혹은 알리바이를 준 건 게임 자체였다. 새로운 빛을 찾아내 희망을 남긴 결말 이후의 엔딩 크레딧에서 제작진은 “전 세계적으로 18억 1천만 명이 심각한 홍수 피해의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라며 자사가 참여 중인 홍수 구호 캠페인의 인터넷 페이지를 알려준다. 해당 페이지에서 그들은 조림 사업을 비롯한 활동 내역을 공개하는 동시에 사람들의 관점을 바꾸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꿀 게임의 힘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한다. 덕분에 내 게임 구매가 좋은 일에 쓰였다는 값싼 만족감을 얻긴 했지만 그걸 말하려는 건 아니다. 아름다운 가상은 현실을 외면하게도 해주지만, 때론 아름다움을 경유해야 주눅 들지 않고 현실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다. 세계와 어떻게 관계 맺을 때, 18억 1천만 수재 인구에 속하지 않은 이들도 홍수를 공통의 문제로 인식하고 책임감을 느낄 수 있을까. <모뉴먼트 밸리 3>는 엔딩에 이르기까지의 아기자기한 퍼즐과 모험의 경로가 하나의 예행연습이었음을 알려준다. 견습생이던 누어가 파수꾼으로서 새로운 빛을 찾아냈듯, 이 눈부신 모험의 끝에서 플레이어는 현실에 대한 책임의 시작을 만난다. 우리의 여정은 더 큰 세계에서 계속될 것이고 또 계속되어야 하며 게임의 빛나는 순간들과 성취의 경험은 남은 여정의 낙관적 의지로 남아줄 것이라고. 마치 등대처럼.
소위 연말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흉흉한 시국과, 그에 상반되는 축제 분위기의 연말 시상식과 무대의 위화감 사이에서 <모뉴먼트 밸리 3>의 체험이 다시 떠오르는 건 그래서다. TV를 보면서도 질문은 반복된다. 폐허가 이렇게 흥겹고 화려해도 될까. 나라가 이 모양인데 뭔 놈의 축제냐고 말하고 싶진 않다. 문화적 즐거움은 뺏기지 않기 위해 투쟁해야 할 대상이지, 먼저 포기해야 할 것은 결코 아니다. 이번 사태로 권력이 부당하게 우리에게서 약탈하려 한 것이 바로 그것임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러니 잠시 웃음과 환호와 화려함과 캐럴을 즐기는 것조차 죄스러운 기분이 들도록 사태를 이 꼴로 만든 권력의 부역자들을 먼저 욕하는 게 마땅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돌려주진 못한다. 엄중한 현실에서도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 <모뉴먼트 밸리 3>는 게임의 반짝이는 순간들을 현실과 온전히 분리된 가상으로 괄호 쳐 그 세계의 아름다움을 지켜내는 대신, 우리가 현실의 문제와 올바르게 관계 맺는 것이 게임만큼 아름답고 긍정적인 경험이 될 수 있다고 말해준다. 물론 이 역시 기만일 수 있다. 다만 끽해야 2시간이면 끝날 스마트폰 속 가상세계로의 몰입으로 현실을 잊게 하려는 것만큼 무망한 시도는 아니다. 그리고 정확히 현재 TV 속 세상이 이러한 2~3시간짜리 허약한 가상을 유지하는 중이다. 마치 12월 3일 밤의 난동이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리얼리티쇼의 리얼리티란 얼마나 빈약한가. 여의도에 울려 퍼진 그 많은 K팝 넘버와 응원봉 시위로부터 단절된 무대 위 공연의 흥이란 얼마나 인위적인가.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재현한다던 연기자들이 이 세계의 지반을 흔든 사건 앞에서도 오직 드라마 캐릭터로서만 남기는 시상식 소감이란 얼마나 공허한가.
흔히 대중문화라는 표현을 쓰지만, 대중이 지난 1년 동안 웃고 울고 감동하고 설레던 그 많은 순간들로부터 정작 대중이 발 딛고 선 세계를 분리 중인 연말 TV 풍경은 씁쓸하기 이전에 허무하다. 대중문화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가상은 대중과의 관계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생산-소비로만 환원될 수 없는 상호주관적 관계망을 통해 거대한 문화의 맥락을 함께 만들어간다는 믿음. 녹록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래도 어떤 가상을 통해 위로받을 수 있는 건, 그것이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다르지만 상관없진 않다는 감각 덕이다. 이 아름다운 가상이 아름답지 못한 현실에 대한 가능성이 되어주리라는 기대 없이는 무엇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없다. 그 정도 기대를 품고 요청하는 것이 무리한 일일까. 나는 지금 드라마, 영화, 예능, 가요에 대해, 각 분야의 종사자에 대해, 연말 시상식에 대해, 왜 한강 작가 같은 작품과 소감을 내놓지 못하느냐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길어야 2시간이면 끝날 모바일 게임 한 편이 재미와 영감과 여운을 남긴 방식으로부터 배울 생각이 없는지 질문하는 것이다. 연말연시, 조금 더 마음 편히 웃고 즐기고 설렐 수 있는 그 사소해서 당연한 권리를 위해. 이 빌어먹을 폐허에서도, 아니 빌어먹을 폐허이기에.
<위근우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