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영국 NHS의 위기, 의미와 변화는?

2025-05-15

[기획] <월간복지동향>이 제안하는 의료대란 해법 “공공의료에서 찾다”

① 닮았지만 서로 다른, 일본 공공의료 현황과 방향 | 이요한

② 시장 중심 의료, 미국 공공의료 도전과 변화 | 정혜주

③ 건강이 인간의 기본권, 이탈리아 국영의료 | 문정주

④ 영국 NHS의 위기, 의미와 변화는? | 이안 그리너, 마틴 파월

2024년 2월 6일 윤석열 정부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계획을 발표하면서 촉발된 의료대란은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과 사회보장제도 근간을 흔들었다. 필수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한 환자 사망률은 증가하고 진료 대기로 인한 피해가 연일 이어졌다. 이는 국민건강보험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며 그동안의 국가적 노력을 허사로 만들었다. 대통령 윤석열이 파면된 지금, 의료대란으로 망가진 구조를 어떻게 발전적으로 복구해야 할까? <월간복지동향>은 그에 대한 해법으로 ‘공공의료’를 주목했다. 앞으로 4주 차에 걸쳐 일본, 미국, 이탈리아, 영국 사례를 살펴보고 제21대 대통령선거 이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 주>

[울산저널]이승진 시민기자= 영국 국민건강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NHS)는 국영 의료서비스다. 자국에 합법적으로 체류하는 외국인을 포함해서 모든 이에게 무상 의료를 제공한다. 비용은 세금으로 충당한다. 호주, 홍콩, 싱가포르, 캐나다 등 옛 영국령 국가 의료제도가 영향을 받아 NHS와 유사하게 설계됐다. 역사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수많은 부상병이 나타나자 무상으로 참전용사를 치료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으나 대공황으로 실현하지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이른 1942년 ‘베버리지 위원회’에서 사회보험에 의한 ‘전 국민 최저 생활 보장 보고서’를 공표한 후 오랜 토론과 협의 끝에 1946년에 NHS 관련법이 제정되고 1948년에 설립된다.

이른바 ‘영국병’으로 진단하며 복지 정책 축소에 나섰던 마거릿 대처도 NHS는 손대지 않았다. 그만큼 NHS는 영국인의 자부심을 상징한다. ‘사람을 살려야 하는 의료 기술을 치료비 문제로 이용할 수 없거나 차별적으로 적용하거나 박탈하면 안 된다’는 의식이 영국인의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유상 의료를 ‘비도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의사 역시 자신의 의술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데 있어 자긍심을 갖고 있다. NHS는 전 세계에서 가장 포괄적인 범위를 보장한다. 98%에 이르는 병원이 우리나라 공공병원 또는 보건소 역할을 한다. 의료진은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다.

<월간복지동향>에 자신들의 학술논문 요약본을 게재한 이안 그리너와 마틴 파월은 “NHS는 설립된 그해(1948년)부터 거의 매일 위기에 처했다는 말이 나온다”면서 “복지국가 사회정책 위기를 탐구하는 데 있어 매우 훌륭한 사례”라고 밝혔다. 이들은 “(주로) NHS 위기는 국가가 제공할 수 있는 자원 규모를 넘어서는 예산 한계”라고 전했다. 위기론이 등장한 그날부터 이에 대한 “조직적 해결책, 서비스 압박 간 타협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NHS는 증가하는 재정과 이해관계자 사이를 중재하며 정치적 개혁 요구를 관리했고 정책 변화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여러 논문을 분석해서 NHS 위기를 5개 유형으로 정리했다. 먼저 ‘재정(자원) 위기’는 신보수주의가 집권한 1980년대부터 이어져 온 문제다. 1997년 노동당 정부도 재정 건전성을 강조했다. ‘인력 위기’는 의료진 임금과 근로 조건 분쟁으로 다른 국가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적은 인력에 따른 문제다. 공직 특성상 낮은 임금도 한계를 초래한다. ‘조직 개편 위기’는 의료서비스 개선이 아닌 정치적(이념적) 동기로 추진되는 경우 혼란을 초래한다. ‘돌봄 실패 위기’는 의료 기관 진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패다. ‘서비스 압박 위기’는 팬데믹과 같은 특정 문제, 동절기 같은 특정 시기 재정 부족, 인력 문제, 돌봄 실패와 연결되며 나타난다.

한편 NHS 위기에 대한 언론보도는 주로 겨울 위기(환자 증가, 자원 한계), 인력 및 채용 위기(간호사 등), 병원 감염(병원 이용자 증가, 의료 인력 부족), 식습관과 비만(설탕 소비, 치아), 정신 건강(계절성), 돌봄과 주거(지역사회통합돌봄) 등 6개로 정리된다고 밝혔다. 이처럼 학술연구와 언론보도의 문제의식이 상이하게 나타나면서 NHS 위기에 대응 정책이 어떻게 변화되는지 살펴보는 데 있어 학자들조차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중요한 정책 변화가 무엇인지 규정하기 어렵고 정교한 추적에 있어서도 보도되는 시기와 정부 조사 사이에 시차가 발생한다. 결국 특정 시기와 공간(지역)의 정책 변화를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

이에 따르면 NHS 위기는 (종합적인) 정책 변화를 위해 필수적이지도 충분하지도 않다. NHS 위기가 충분조건이 아닌 이유는 모든 위기 시기에 정책 변화가 뒤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NHS 위기와 정책 변화의 관계를 정확하게 표현하면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다. 모든 위기가 정책 변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며 모든 정책 변화가 위기를 전제로 하지도 않는다. 개별 사건이 정책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정부가 문제를 인정하고 이에 대응할 의지와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 논리대로라면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의료대란은 윤석열 정부의 엇나간 의지는 강했던 반면 능력은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NHS 위기론’은 매번 정책 변화의 전환점이 되지는 않지만 서비스 압박이 심화돼 실패 위험이 커지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유용하다. 즉각적인 전환점과 점진적인 축적으로 발생하는 위기로 나누어 대응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유사한 내용의 위기론이 반복적으로 회자되면 정책적 무관심과 구조적 한계를 일상으로 만든다. 장기간 이런 문제가 이어지면서 더 광범위한 경제·사회적 문제 간 연계가 부족하도록 만들었다. 건강 시스템 내부 문제로 한정 짓게 만들면서 이들 문제의 근본 원인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든다. 불평등과 경제적 긴축 같은 구조적 문제가 배제될 가능성도 커진다.

이처럼 NHS 위기는 더 넓은 경제적·사회적 질병 현상으로 이해돼야 한다. 이 논문에서는 공적 복지와 사적 복지의 적절한 경계, 전문가와 관료의 권한, 경제적 긴축 시대 이타적 사회정책 한계에 대한 불확실성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다만 언론보도는 위기의 근본 원인과 단절된 모습을 보인다고 밝혔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NHS뿐만 아니라 영국 사회 전반에 부적절한 결과가 퍼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NHS의 정책 변화는 현재 위기를 시스템 내부 문제로만 이해하지 않고 경제적·사회적 원인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재구성해야 함을 강조한다. 의료대란에 대한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는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승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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