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르는 게 값일 정도인 반도체 초호황기에 기판 업계가 생존을 걱정하는 건 원자재 가격이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는데 '제 값'을 받지 못해서다.
이달 뉴욕상품거래소 기준 국제 금 가격은 온스당 4400달러를 처음 넘었다. 연초 대비 60% 이상 급등했다. 1979년 오일쇼크 이후 최대 상승폭이다.
구리 값도 사상 처음 1만2000달러(런던금거래소 기준)를 돌파했다. 올 한해만 37% 올라 2009년 이후 최대 오름폭을 기록했다.
금·구리는 반도체 기판에 없어서는 안될 소재다. 금은 기판 표면 처리에 필수인데, 부식을 막고 반도체와 기판 간 접촉 저항을 최소화하는 역할을 한다. 구리는 기판에 들어가는 금속 중 90% 이상을 차지한다. 기판 회로와 층 간 연결을 맡은 일종의 '혈관'이다.
국제 금·구리 가격 인상은 기판 업계에 비용 상승이다. 원자재 값이 오르니 생산 비용이 오를 수 밖에 없다.
문제는 다음부터 벌어진다. 보통 재료값이 오르면, 최종 제품 가격도 같이 오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판 업계는 실제 판매 가격에 원재료 상승분을 반영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제도적 장치는 있다. 납품단가 연동제다. 납품단가 연동제는 주요 원재료 가격 변동을 납품 단가에 반영, 공급업체 부담을 줄이고 공급망을 안정화하기 위해 2023년 10월 시행됐다.
그러나 연동에는 '조건'이 있다. 주요 원재료 가격이 납품 대금의 10% 이상을 차지해야 한다. 쉽게 말해 기판이 100원이라 했을 때 구리 단가가 10원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납품 단가 연동 대상에서 제외시키기 위해 원재료를 여러 개로 나누어 10%를 넘지 못 하도록 계약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명 '쪼개기 계약'이다.
국내 기판 산업 단체인 KPCA는 “'쪼개기 계약'으로 견적서를 요청해 납품 단가 연동제를 회피하는 사례도 확인됐다”고 밝혔다.
또 납품단가 연동제는 대금 1억원 이하 소액 계약, 기간 90일 이하 단기 계약은 대상이 되지 않는다. 보통 반도체 소재·부품은 1년 단위 계약을 많이 하지만 최근에는 분기별 계약도 만연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다른 기판 업계 관계자는 “90일 조건을 우회하기 위해 분기(3개월) 이하 단위로 계약을 체결하는 상황이 많아졌다”며 “최근에는 그 기간도 더 축소하려는 협상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결국 원자재 가격 상승을 납품 단가에 반영하지 못한 기판 업계는 차세대 제품에 일부 가격을 높이는 방법으로 수익을 확보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 비중이 적어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평가다.
◇ 공정 거래 환경 위한 제도 개선 시급
기판 업계는 납품단가 연동제 회피 행위, 특히 부당한 계약 쪼개기 등을 금지할 수 있는 개선책이 시급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원자재 가격 상승분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면, 기판 업계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 있어서다. 이는 산업 생태계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KPCA는 △상생 협력 단가 구조를 마련하기 위한 정부 중재 △장기 납품 계약 유도 정책 등을 방법론으로 제시했다.
안영우 KPCA 사무총장은 “최근 원자재 뿐 아니라 전기·가스 등 에너지 비용도 납품 대금 연동제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업계에서 요청하고 있다”며 “기판 공장 가동률은 높아지는데 수익을 확보하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 최소한의 운용 비용을 보장하는 제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또 금·구리 등과 같이 원자재 가격 변동이 심할 경우를 대비, 공급망 조기 경보 체계 구축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후 대책이 아니라 사전 대응 태세를 갖추기 위해서다.
안 사무총장은 “'소재·부품-기판-OSAT-종합반도체기업(IDM) 등 전체 생태계의 상생 구조를 확보해야 국내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며 “기판도 반도체와 같이 국가 전략 산업 관점에서 접근해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권동준 기자 djkwon@et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