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지털 전환이 금융의 판도를 바꾸는 가운데, 한국 금융은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혁신성, 포용성, 국제 경쟁력 측면에서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윤종원 KDI 초빙연구위원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23일 서울 중구 을지타워에서 열린 '제3차 싱귤래리티 금융 소사이어티(SFS)' 회의에서 '한국 금융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발표하며 “AI·빅데이터·블록체인·디지털화폐 등 신기술이 금융 서비스의 구조와 범위를 완전히 재편하고 있다”면서 “자금중개·신뢰·리스크 기반 산업이라는 업의 본질은 바뀌지 않지만 서비스 방식과 주체는 급격히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윤 위원은 미래 은행 시나리오와 관련해 중장기적으로는 “기존 은행과 디스럽터(빅테크 등)가 기능을 분업하거나 공존하는 구조, 혹은 디스럽터가 고객 접점을 지배하고 은행은 인프라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구조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특히 디지털화폐와 빅테크의 금융시장 진출은 기존 은행의 지급결제 기능을 위협할 가능성이 높다. 그는 “플랫폼이 고객 접점을 장악하고 은행은 인프라 제공자에 머무는 '은행 없는 뱅킹' 시대가 현실화할 수 있다”면서 “각 업권별 디지털 전략 정비와 함께, 기술 중립적 규제 프레임워크, 데이터 프라이버시·공정경쟁·소비자보호 등을 아우르는 통합 정책 기반 마련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디지털 전환에 대한 업권별 대응도 강조됐다. 윤 위원은 “은행은 디지털 전환을 통해 신상품 개발·판매채널 다변화·플랫폼화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면서 “금융투자회사는 디지털화 대상 사업을 선별하고 거래 플랫폼의 기능 고도화가 필요하다”고 짚었다. 이어 그는 “보험회사는 신상품 개발, 방카슈랑스의 디지털화와 함께 테크기업 아웃소싱을 통해 백오피스 기능을 효율화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책 및 규제 측면에서도 디지털 기술혁신에 부응하는 구조 개편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술 중립적 접근을 기본 원칙으로 하되, 가상자산 등 새로운 금융상품과 서비스에 대해서는 △금융안정 △소비자 보호 △공정경쟁 △데이터 프라이버시 △자금세탁 및 탈세 방지 등을 아우르는 기본 규제 틀 마련을 과제로 꼽았다.
국내 금융산업의 구조적 한계에 대한 우려도 나왔다.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질적 측면에서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실제 국내 금융회사 자산 규모는 6741조원에 이르고, 금융자산 비율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285%에 달하는 등 양적 지표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근접해 있다. 다만, 자금 운용 구조를 살펴보면 국내 은행은 중소기업 대출을 회피하고, 대신 주택담보대출 중심의 가계 대출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윤 위원은 “위험 관리 역량이 뛰어난 은행일수록 오히려 안전자산 위주의 대출로 위험을 회피하고 반대로 역량이 부족한 중소 금융회사들이 위험도가 높은 기업 대출을 감당하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면서 “자금이 생산적 투자로 흐르도록 금융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금융권 전반의 보수적 대출 관행은 자금의 흐름을 부동산 시장에 집중시키고 있다는 평가다. 상호금융회사의 부동산 및 건설업 대출 규모는 2014년 5.6조원에서 2020년 36조원으로 6배 넘게 증가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혁신기업에 대한 대출은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다. 윤 위원은 “한 연구에 따르면 종합투자금융사의 기업 대출 90% 이상이 담보 중심이었고, 사모펀드의 해외 부동산 투자 잔액은 100조원을 상회, 추정 손실률도 30%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언급했다.
이어 그는 “부동산 중심 자금 운용은 한계에 봉착했다”면서 초대형 IB의 발행어음 운용, 사모펀드의 투자 기준 등 제도적 장치를 개편해 기업 투자 중심으로 물꼬를 틀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윤 위원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부동산 투자 한도 축소 △중소·벤처기업 투자 의무비율 확대 △레버리지 규제 재정비 등을 제안했다.
윤 위원은 금융산업의 포용성 문제도 짚었다. 그는 “금융 자유화 이후 소득 상위 5%의 비중이 더 높아지는 등 분배 악화 현상이 나타났다”면서 “금융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포용성 강화 노력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실제 KCB 자료에 따르면 1등급(우량) 차주의 평균 금리는 약 5.3% 수준이지만, 9등급(저신용) 차주에겐 최대 20.6%의 금리가 적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용등급이 낮을수록 연체율이 증가하지만 적용금리는 연체위험 이상으로 가파르게 상승한다는 지적이다.
그는 “금융이 혁신의 사다리이자 불평등 완화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서민·중산층의 자산 형성을 지원하고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취약계층의 금융 접근성 개선 및 채무 조정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윤종원 위원은 국내 은행산업의 과점 구조가 금융의 효율성과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량 고객을 대상으로는 경쟁이 치열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유효경쟁이 부족한 과점 시장이 지속되고 있다”며 “신규 플레이어의 시장 진입 확대와 함께, 시장 규율 및 감독 역량 강화가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국내 은행업은 소수 대형은행 중심의 시장 집중도가 높으며, 중소기업 대출이나 신용대출 부문에서도 이 같은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에 따라 자금이 특정 영역에만 몰리고, 금리나 서비스 경쟁이 제한적인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윤 위원은 이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스몰 라이선스 도입 △은행 신규 인가 확대 △챌린저 뱅크 육성 △핀테크·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한 결제·송금 인프라의 다변화 등을 제안했다. 그는 “경쟁을 촉진하고, 다양한 수요에 맞는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규제 혁신과 시장 진입 장벽 완화가 필수적”이라고 짚었다.
박유민 기자 newmi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