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25)- 양호도순무영의 공식 기록인 <갑오군정실기> 1부

2024-11-20

새로운 사실이 쏟아진 동학농민혁명 사료

<갑오군정실기>는 1894년 9월 22일(양력 10월 20일) 조선 정부에서 호위부장 신정희(申正熙)를 도순무사에 임명하고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을 설치할 때부터 이해 12월 27일(양력 1895년 1월 22일) 폐지될 때까지 95일 동안 주고받은 공문서를 모은 사료이다. 모두 10책으로 9책은 공문서집이고, 마지막 10책에는 순무영의 지휘 아래 활동한 장졸의 인원과 전공을 기재했다. 유일 필사본으로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도원수에 해당하는 양호도순무영의 위상

조선왕조의 군사제도에서 순무영은 상설기구가 아니었다. 영조 4년(1728년)에 무신란이 일어나자 긴급히 오명항을 4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에 임명해서 진압하도록 했다. 4로는 군대의 진군과 후퇴 등이나 사방의 길을 의미하는데 또 4도순무사(四道巡撫使)로 말한 것을 보면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4도의 의미로 보이기도 한다.

순조 11년(1811년)에 서북 일대에서 홍경래난이 벌어지자 양서순무영(兩西巡撫營)을 설치했는데 양서는 관서와 해서를 의미한다. 고종 3년(1866년)에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다시 기보연해순무영(畿輔沿海巡撫營)을 설치했는데 기보연해는 경기도 해안지역을 의미한다. 임시 군사지휘부인 순무영은 군무 활동지를 명시해서 운영하였다.

정부는 동학농민군의 1차봉기를 호남과 호서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보았다. 그래서 홍계훈을 양호초토사에 임명해서 경군을 이끌고 진압하도록 했다. 전국에 걸친 2차봉기가 일어나자 위기 상황을 파악한 왕조정부는 호위부장 신정희를 양호도순무사에 임명해서 진압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도순무영은 경군 병영과 지방 병영만 지휘하지 않았다. 진압에 관련된 군사상 기밀은 해당 군현에서 곧바로 순무영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신정희에게 내린 국왕의 교서는 도순무사가 ‘품계로는 도원수에 비교’되고, ‘재상의 반열에 해당’한다고 했다. 최고 군사지휘부의 위상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하여 경기감사 · 충청감사 · 전라감사 · 경상감사 · 황해감사 · 강원감사도 도순무사에게 직접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약탈해간 <갑오군정실기>

조선왕조는 커다란 사건을 겪으면 백서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양서순무영과 기보연해순무영은 그런 전례에 따라 전란 종료 후 각각 5책씩 <순무영등록>을 만들었다. 이 등록은 홍경래난과 병인양요를 생생한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그러나 양호도순무영의 등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등록>은 공문서를 모은 형태를 띤다. 주고받은 공문을 날짜별로 편집해서 각종 사건을 알려주는 것이다. 물론 모든 공문서를 모은 것은 아니다. 양호도순무영의 문서 담당 인원은 11명이었다. 이들은 공문서를 분류하고 묶어놓은 일이 책무가 된다. 이런 직책이 있으면 틀림없이 공문서집을 만들었을 터이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공문서집의 존재는 2011년 12월에 실체가 확인되었다. 이때 일본 궁내청 소장 조선도서 1205책이 반납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약탈해간 고도서가 중심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일본 궁내청 소재 조선왕조 도서 환수기념 특별전’을 열었는데 ‘국내에 없는 유일본’인 <갑오군정실기>가 포함되었다.

<갑오군정실기>를 검토한 결과 그 체제가 기존 <순무영등록>과 같은 것을 알게 되었다. 선례에 따라 도순무영의 설치 근거인 국왕의 윤허 기록을 첫 부분에 실었고, 날짜별로 일어난 사건과 수발한 공문을 전재하였다. 오직 이름만 다를 뿐이었다.

<갑오군정실기>의 기구한 이력 배경

양호도순무영은 설치 목적을 완수한 이후 잔무까지 처리하고 해산하지 못했다. 일본공사의 압력을 받아 중도에 폐지된 까닭이었다. 양호도순무영이 일본공사관과 협조하지 않자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외부대신 김윤식을 공사관에 불러 지침을 내리는 등 간섭을 자행하였다.

마침내 일본공사는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해서 도순무영을 와해시켰다. 도순무사 신정희는 12월 23일에 강화유수로 전임되었고, 같은 날 중군 허진은 경기도 통진부사로 좌천되었다. 좌선봉 이규태도 전라도 파견 현지에서 소환되었다.

이런 까닭에 양호도순무영의 공식 기록을 도순무사와 중군이 관여하는 형태로 만들 수가 없었다. <갑오군정실기>는 잘 정서한 필사본이지만 중앙관서에서 만든 책으로는 체제가 번듯하지 않다.

우선 이름도 <순무영등록> 또는 <양호도순무영등록>이 아닌 <갑오군정실기>라고 붙였다. 유일본 여부도 알 수가 없다. 정서를 한 것을 보면 서사가 베낀 것으로 보이나 몇 벌을 필사했는지 확인할 수 없다. 도순무영에서 공식으로 만든 보고서라면 더 필사를 해서 여러 권을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어디에도 주도한 사람에 관한 기록이 없다. 도순무영의 종사관이든 참모사이든 이름이 나와야 하는데 성책한 담당자의 이름이 없다.

도순무사 신정희의 가전 장서에도 이 책이 존재했다는 증언이 나오지 않는다. 일본과 대신이 협력한 군부가 소장했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반출한 도서에 포함되었을 수가 있다. 무려 한 세기 이상 <갑오군정실기>는 일본 궁내청에 소장된 상태로 알려지지 않았다가 반환도서에 들어가서 되찾게 된 것이다.

<갑오군정실기> 10책의 구성과 주요 내용

각 책에 공문을 정리한 날짜와 면수는 다양하다.

1책 (118면) : 갑오 9월 22일 – 10월 11일

2책 (87면) : 갑오 10월 11일 – 10월 20일

3책 (92면) : 갑오 10월 21일 – 11월 2일

4책 (98면) : 갑오 11월 3일 - 11월 15일

5책 (72면) : 갑오 11월 16일 - 11월 21일

6책 (95면) : 갑오 11월 21일 - 11월 30일

7책 (76면) : 갑오 12월 1일 – 12월 10일

8책 (67면) : 갑오 12월 10일 - 12월 15일

9책 (104면) : 갑오 12월 16일 – 12월 28일

10책(114면) : 유영장졸(留營將卒) 출진장졸(出陣將卒) 기공(紀功)

합계 923면

날짜로 보면 짧을 경우 6일치 공문서를 모았고, 길 경우 20일에 달하는 기간의 공문서를 모았다. 각 책의 면수도 모두 다르다. 8책의 67면에서 1책의 118면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난다. 내용에 따라서 구분하지도 않았다. 같은 날에 해당하는 내용이 앞책의 마지막과 뒷책의 첫부분에 이어져 있기도 하다. 정서를 한 후 일정한 기준을 두지 않고 면수와 관계없이 책으로 묶었다.

도순무영에 속해서 활동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 그리고 인원수를 기록한 10책의 유영장졸(留營將卒)은 서울의 도순무영 본부에서 활동한 장졸을 의미한다. 유영장졸 중 일부는 전라도와 충청도로 파견을 나가기도 했고, 뒤에 군사를 거느려서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벌인 인물도 있다.

여기에 전재된 주요 공문서는 <고종실록> <순무선봉진등록> <순무사각진전령> <선봉진일기> 등에 실린 각종 자료와 동일하다. 1959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동학란기록> 2책에 포함되어서 일찍 알려진 것들이 많다. 하지만 이런 자료에 나오지 않는 새로운 공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전국 여러 지역의 동학농민군 지도자와 활동상이 처음 나와서 연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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