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줄기세포·탄소절감 등 ‘필연 기술’, 규제 철폐 시급하다

2024-09-30

21세기 길목을 지키는 기술 전략

지도를 보면 많은 도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그 많은 도로 중에서도 어느 길은 한산하지만, 어떤 길은 차가 꽉꽉 막힌다. 차가 막혀도 꼭 거기를 통해야만 볼일을 볼 수 있으니, 할 수 없이 그 길로 간다. 이렇듯 많은 사람이 지나갈 수밖에 없는 길목이 있다. 만약에 영업을 하고 싶으면 이 길목에 점포를 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길목도 시간이 지나면서 바뀐다. 새로운 길이 생기고 또한 사람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변해 동선이 바뀌기 때문이다.

기술에도 이처럼 길목을 지키고 있는 기술이 있다.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이 기술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오늘날 반도체 기술이 그렇다. 필자는 이런 기술을 ‘필연(Inevitable) 기술’이라고 부른다.

상권에 길목 중요하듯 필연적으로 이용해야 하는 기술도 존재

편의성 높여줄 AI, 노화 늦춰줄 줄기세포 기술 등 치열한 경쟁

AI 자율주행 핵심은 데이터, 한국은 개인정보 보호에 발목 잡혀

낡은 규제가 신기술 발전 가로막는 어리석음 되풀이해선 안 돼

필연 기술도 시간이 흐르면서 변한다.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고 인간의 욕구가 변하기 때문이다. 과거 20세기에는 자동차·항공기·컴퓨터·인터넷 기술들이 필연 기술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기술들을 값싸게 제공하는 회사가 많아지자, 거의 모든 사람이 손쉽게 이용하는 일반 기술이 됐다. 이제 21세기가 됐다. 21세기에는 새로운 기술이 길목을 지킬 필연 기술로 떠오르고 있다.

전통에 집착하면 신기술 발전 못 해

새로운 도로가 생기면 기존 도로가 영향을 받는다. 통행량이 줄어들어 영업이 잘 안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간혹 기존 상권의 사람들이 변화를 반대하는 시위를 하기도 한다. 새로운 기술의 출현에도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면 기존의 이익 사슬이 바뀌고, 손해 보는 사람들은 반대하게 된다.

여기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게 된다. 신구 기술 사이의 조화를 어떻게 이뤄 내느냐가 국가의 경쟁력과 일자리 창출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신구 기술의 갈등은 전통 산업이 강한 나라에서 발생한다.

역사 속에서 전통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신기술 진입을 가로막아 낭패를 본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사례가 영국을 자동차 산업 후진국으로 만들어 버린 ‘적기조례’ 사건이다. 19세기 말에 자동차가 출현하자, 기존 마차업자들의 생계가 위협받게 됐다. 마부들의 표면적 주장은 기계식 자동차는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영국 정부는 적기조례를 만들었다. 자동차의 속도를 시속 23㎞로 제한하고, 자동차 앞에서 기수가 빨간 깃발을 들고 위험 신호를 하도록 했다.

그러나 독일·프랑스 등 주변국의 대응은 달랐다. 심지어 독일은 자동차 속도 제한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독일의 고속도로에는 속도 제한이 없다. 그 결과 독일과 프랑스에서 자동차 산업의 발전은 지금 목도하는 바와 같다.

20세기 말에 디지털 기술을 맞이하는 유럽의 태도는 더욱 한심한 결과를 가져왔다. 아날로그 산업이 발달해 있던 유럽에서 디지털 기술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유럽의 생산 활동은 아날로그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결과는 아래와 같이 돼 버렸다. 현재 유럽 사회는 검색은 구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왓츠앱(WhatsApp), 내비게이션은 웨이즈(Waze), 전자상거래는 아마존에 의지하고 있다. 그리고 휴대전화·반도체·배터리·TV·디스플레이는 만들지 못하고 거의 전부를 수입하고 있다. 완전히 디지털 후진국이 돼 버렸다. 과학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과학기술로 치면 미국과 함께 세계 최정상급이다. 유럽을 이렇게 만든 것은 전통 산업에 집착한 사상 때문이다.

인간 욕구에 비춰보는 ‘필연 기술’

인간에게는 세 가지 중요한 본능이 있다고 생각된다. 편의성에 대한 욕구, 건강에 대한 욕구, 생존에 대한 욕구가 그것들이다. 21세기 필연 기술도 이런 본능에 비춰 보면 잘 보인다. 첫째 편의성에 비춰보면 인공지능(AI) 기술은 계속 발전할 수밖에 없다. 둘째 건강 욕구의 관점에서 보면 줄기세포와 유전자 가위 기술은 필연적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다. 셋째로 인간 생존의 이슈에서 보면 기후변화와 에너지 문제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다.

이상의 필연 기술은 인간의 욕구가 흐르는 길목에 있는 기술이다. 이 기술을 손에 쥔 국가는 매우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된다. 신기술을 가진 나라는 새로운 산업을 일으켜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번영을 누리고 튼튼해진다. 따라서 이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하지만 앞서 살펴봤듯이, 새로운 기술의 출현은 기존의 질서 또는 사상과 갈등을 조장하기 쉽다. 첫 번째 필연 기술인 AI 기술은 대표적으로 개인정보 보호와 부딪친다. AI 시스템의 핵심은 데이터다. 데이터에는 개인정보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정보 보호는 AI의 학습 데이터 확보에 걸림돌이 된다. 빅데이터 산업이 미국에서는 활발하지만, 한국에서는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개인정보 보호 때문이다.

자율주행 차량도 AI 기술의 중요한 응용이다. 자율주행 차량은 운행하면서 데이터를 확보하고 학습해 성능을 향상한다. 미국과 중국에서는 이미 길거리에 자율주행 택시가 운행 중이다. 하지만 한국의 자율주행 차량은 길거리 사람의 얼굴 모습도 개인정보로 간주해 직접 활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해서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 사용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속도가 현저히 떨어져 실시간 자율운행에 큰 부담이 된다. 기존의 사상과 신기술이 충돌하는 모습이다.

줄기세포 실험, 국내선 거의 불가능

두 번째 필연 기술인 줄기세포와 유전자 가위는 인간의 생명을 연장해 주는 매우 파격적인 기술이다. 노화돼 가는 혈액이나 관절을 젊게 고쳐주고, 유전병을 고쳐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한국에서는 환상에 그치고 있다. 한국의 생명윤리 기준은 세계에서 가장 엄격해 이 분야 실험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국가의 부가 유출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미 주위에서 줄기세포 주사를 맞으려 외국에 다니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신기술을 수용하는 태도가 달라서 빚어진 현상이다.

세 번째 필연 기술은 기후변화와 에너지 관련 기술이다. 이 기술들의 개발과 보급에는 특별한 논란이 있다고 볼 수 없다. 신재생 에너지 개발과 공기 중에 퍼져 있는 탄소를 포집해 고체로 만들어 보관하자는 연구에 모두 동의한다. 그런데 이 기술이 하루아침에 만족할 수준으로 완성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 과도기의 에너지원으로 원자력발전에 대한 논란이 매우 뜨겁다. 급기야 정치권에서 진영 간 대립의 소재 거리로 발전해 고통을 겪고 있다.

새 일자리 수십만 개, 그냥 놓칠 건가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국적에 상관없이 동일한 룰에 따라서 경쟁한다. 그런데 세계 기술 경쟁에서는 국가별로 다른 규정을 적용하며 경쟁하고 있다. 국가별로 연구개발과 산업의 규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자율주행 차량에서 중국은 거의 무제한의 자유도를 가지고 길거리 주행을 하며 데이터를 수집하며 학습한다. 미국도 매우 높은 수준의 자유도를 가지고 길거리 주행 실험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데이터 수집부터 개인정보 보호 기준에 걸려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국 자율주행 차량의 미래는 보나 마나 뻔하다. 규범이나 규제도 이제 한 국가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변국이 어떻게 하는지 봐서 정해야 한다. 가능하면 주변국과 비슷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좋다.

이제 기술과 산업의 발전은 글로벌 경쟁시대가 되었다. 특히 필연 기술은 모든 국가가 국운을 걸고 치열하게 경쟁을 하는 분야다. 이 기술의 확보 여부는 국력과 일자리 창출의 결정적인 키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전통 사상도 중요하다. 전통 사상이 갑자기 흔들리면 사회 불안과 갈등의 소지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약 30만 명의 청년 실업자가 하늘을 바라보며 한탄하고 있다. 이 청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도 없다고 생각한다. 이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이라면 전통 사상도 양보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드론 산업을 놓쳐서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놓친 경험이 있다. 원격진료 기술을 육성하지 못해 세계 시장을 개척할 기회를 상실하고 있다. 21세기 필연 기술을 가로막으면 또다시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놓칠 것이다. 전통 사상과 신기술의 지혜로운 타협이 필요한 시기다.

이광형 KAIST 총장, 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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