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감독·교육자·행정가 세 번의 삶… 방열 “감독님 소리 가장 좋아” [나의 삶 나의 길]

2025-02-11

방열 농구협회 고문

농구감독으로 인생 1막

잦은 부상으로 일찍 은퇴

현대 농구단 초대 감독직

정장 입고 코트에 서 화제

강단에서 인생 2막

만 52세 때 전임강사 임용

텃세 심해 강의 준비 최선

학생처장·대학원장 역임

협회장으로 인생 3막

농구인들 권유로 새 도전

AG 남녀 최초 동반 우승

지원 부실 등 오해 사기도

긴 인생을 살다 보면 전환점이 찾아오지만 변화를 받아들이란 쉽지 않다. 그래서 살아가며 만나는 변곡점마다 그에 적응해 묵묵히 성과를 이룬 사람은 존경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방열(84) 가천대 명예교수이자 대한민국 농구협회 고문이 바로 그런 존재다. 오랜 농구팬들에게는 명감독으로 알려졌지만 그는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친 교육자이기도 하고, 농구협회를 이끈 행정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각각의 분야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이뤄냈기에 더욱 놀랍다. 지난 7일 경기 용인의 한 카페에서 만나 들어본 그의 인생 궤적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적지 않다.

◆인생 1막 농구 선수와 감독

호기심 많고 승리욕 강했던 경복중 2학년생 방열은 서울 장충코트(당시는 아직 체육관이 아닌 야외 경기장 바닥에 나무 코트만 깔렸었다)로 경복고와 대경상고의 농구경기 단체응원에 갔다가 경복고가 아쉽게 지자 분이 풀리지 않았다. 내가 승리로 갚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북받쳤다. 때마침 학교에서 한 선배가 자신의 모자를 빼앗아 학교 체육관으로 불렀다. 체육관 청소를 하면 모자를 돌려준다기에 열심히 청소했는데 그 선배가 농구공을 주면서 놀라고 했다. 방 고문은 “그때가 처음 농구공이란 걸 만져보는 순간이었다. 느낌이 너무 좋았다”고 말한다.

그렇게 그는 선수가 됐고 경복고로 진학해 대경상고를 꺾었다. 다음은 아시아 제패를 꿈꾸며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해서도 농구 선수의 연을 이어가 국가대표가 됐다.

하지만 선수로서 아시아 정상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잦은 부상에 일찍 선수에서 은퇴한 방 고문은 다른 길을 모색했다. 바로 유학이었다. 방 고문은 “대학 동기생은 2학년 때부터 외무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난 운동하느라 고시를 준비하기엔 너무 많이 와 버렸더라”라면서 “그래서 생각한 게 유학이었다. 한국에 스포츠 교육을 전공한 사람이 없어서 꼭 공부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물론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라 국가 유학시험에 도전했다. “영어와 국사 두 과목이었는데 너무 영어 공부만 치중하다 국사 점수가 못 미쳤다. 1년을 더 준비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런 방 고문에게 중요한 제안이 하나 왔다. 바로 새로 창단하는 조흥은행 여자농구단의 코치직이었다. 은행원으로 취직하면 집안 살림에도 보탬이 되기에 유학의 꿈을 접고 20대 후반에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래도 학구열에 불타 미국 농구서적을 구해 번역하는 일은 쉬지 않았다. “당시 어렵게 구한 책이 한국에 오려면 몇 달이 걸렸다. 배로 오다 보니 책 일부를 쥐가 갉아먹은 채로 도착하기도 했다”고 떠올렸다.

지도자의 길은 쿠웨이트 감독으로 이어졌다. 한국보다 세 배나 많은 월급에 대우도 좋았지만 3년 만에 다시 귀국길에 올랐다. 바로 1977년 현대 남자농구단이 창단하면서 그를 감독으로 영입했기 때문이다.

당시 현대와 삼성이 남자농구단을 동시에 만들며 그야말로 최대 라이벌 시대가 열렸다. 선수 스카우트부터 전쟁이었다. 당시 방 감독은 새로운 화제를 만들었다. 바로 1978년 열린 삼성전에 정장을 입고 코트에 나타난 것이다. 이는 ‘패션쇼 하느냐’며 논란이 됐다. 심판은 구두를 신고 코트에 나왔다고 테크니컬 파울을 줬다. 방 고문은 “내가 좋아하는 후배인 김인건이 삼성 코치인데 화내고 얼굴 찌푸리는 행동이 하기 싫었다. 정장을 입으면 행동이 조심스러워질 거라 생각하고 한 것”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한동안 방 감독의 정장 착용은 일탈로 여겨졌고 그래서 매번 테크니컬 파울로 자유투 2개를 상대에게 주며 0-2로 경기를 시작해야 했다. 그래도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추후 농구협회 이사회에서 자초지종을 설명한 끝에 정장이 받아들여졌다. 이후 농구 감독들의 정장 착용은 확산돼 이제는 익숙한 장면이 됐다.

방 고문은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감독으로 선수 때 못 이룬 아시아 제패의 꿈도 이뤘다. 당시 인도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선수들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어 결승전을 앞두고 컨디션이 엉망이었다. 이에 방 감독은 선수들이 설렁탕이라도 먹으면 힘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육수는 있지만 소를 신성시하는 인도라 소고기를 구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래도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당시 현지 가이드가 알려준 소고기 암시장을 찾아가 고기를 구했다. “터번을 쓰고 수염을 기른 사람이 보초를 선 한 건물에 들어가니 고기가 걸려 있더라. 달러를 주니 고기를 칼로 턱 잘라 영자신문에 말아 줬다. 혹시 걸리면 외교문제까지 될 수 있어 조마조마했다”고 모험담을 털어놨다. 어쨌건 소고기로 힘을 낸 선수들은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가져 왔다.

◆인생 2막 강단에 선 방열

방 고문은 새로 창단한 기아 농구단에 스카우트되며 감독으로 성공가도를 이어갔다. 농구대잔치 시대가 열리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며 기아도 우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에게 시련이 닥친다. 연세대와 중앙대 선수들이 주축이었던 기아에서 방 감독이 한쪽 편을 든다는 오해가 있었고 이는 선수들의 태업으로 이어졌다. “선수들도 잘못한 것이 있지만 모든 걸 보살펴 보지 못한 내 잘못도 작지 않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결국 방 고문은 총감독으로 일선에서 물러나며 인생의 변곡점을 맞았다. 이때 그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농구를 떠나 강단에 서겠다는 것이었다. 어릴 적 꿈 때문이다. 방 고문은 “서울 교동초등학교 입학식 당시 이규백 교장선생님의 연설을 듣고 나도 교육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당시 친구들이 전차 운전수나 대통령을 꿈이라고 말할 때인데 좀 독특했던 것 같다”며 웃었다. 틈틈이 공부하며 학위를 받아놓고 강의를 다녔던 것이 도움됐다. 그래서 스스로 교수 임용 공고를 찾아다녔고 마침 경원대(현 가천대)에 지원해 3차에 걸친 면접 끝에 전임강사로 임용됐다. 1993년 그의 나이 만 52세 때였다.

물론 쉽지 않았다. 기존 교수들의 텃세와 견제도 심했다. 그래서 다른 말이 안 나오게 더욱 노력했다. 한번 강의를 위해 2∼3일을 준비했다. 하루는 학교 연구실에서 원고를 쓰느라 자리에 앉아 있다 일어났는데 한쪽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시계를 봤더니 무려 15시간이나 한자리에 앉아 있었던 탓이었다. 결국 의사를 찾아가야 했고 딱딱한 나무 의자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 골반 쪽 이상근에 이상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지금도 자주 아프다”고 방 고문은 말한다. 이런 노력은 그가 학생처장과 대학원장까지 역임하는 원동력이 됐다.

가천대에서 정년을 맞이한 방 고문은 경북 안동에 있던 건동대 총장도 맡게 된다. 이 역시 아무 연고도 없는 곳이었지만 스스로 공고를 보고 지원해 자리를 맡게 된 도전의 결과였다.

◆인생 3막 이번엔 행정가로 다시 농구로

교육자로서의 삶도 마무리한 만 72세이던 2013년 농구인들이 방 고문을 찾아왔다. 자신들이 뒤에서 열심히 지원할 테니 농구협회장 선거에 나서 달라는 것이었다. 이에 이번엔 농구 행정가로 변신하며 세 번째 인생에 도전했다.

농구협회장으로서 여러 중요한 현안이 있었지만 그중 시급한 것 하나가 국제대회에서 이어진 부진을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 계기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이었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한국 농구는 역대 최초 아시안게임 남녀 동반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방 고문은 첫 4년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려 했지만 다시 농구인들의 권유로 두 번째 임기까지 협회장을 역임했다. 하지만 임기 막판 오해와 잘못된 보도로 많은 비난을 들었던 점은 지금도 안타깝다. 바로 농구대표팀 지원 부실 문제다.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치러지는 아시아 지역예선 등의 경기는 홈팀이 원정팀의 모든 비용을 부담한다. 그런데 홍콩 원정길에 선수 숙소가 좋지 않았고 이를 한 선수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사진으로 올리면서 농구협회에 비난이 쇄도했다. 방 고문은 “홍콩 측이 준비한 것이기에 우리가 호텔 상황에 대해 알 수도 없었던 일이었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또 다른 오해는 미국여자프로농구(WNBA) 진출 문제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뒤늦게 합류하게 된 박지수와 인천에서 같은 비행기로 자카르타로 향할 때 벌어졌다. 박지수는 비즈니스석이고 협회장인 본인인 이코노미석이었는데 이를 알게 된 박지수가 자리를 바꾸자고 했던 것. 하지만 방 고문을 이를 거절했다. 그런데 기사에는 선수는 이코노미를 태우고 협회장은 비즈니스를 탔다고 반대로 나가며 모든 비난이 자신에게 쏟아졌다. 방 고문은 “당시 기자와도 싸우기도 했지만 여전히 오해하는 이가 많다. 오해만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세 번의 다른 인생을 살아온 방 고문에게 물었다. 감독님, 교수님, 회장님 중 무엇으로 불리는 것이 가장 좋으냐고. 답은 간명했다. “내가 교수나 협회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이 다 농구로 유명인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독님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젊은 농구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잊지 않았다. “먼저 스포츠에 관한 책을 좀 읽었으면 좋겠어요. 특히 미국에는 프로 선수들이 은퇴하고 쓴 책이 매우 많아요. 그들이 겪은 생생한 교훈을 통해 실패와 성공의 이유를 배울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선수로서의 인생만이 아닌 제2의 삶을 준비해야 합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도 많아요. 농구 외에도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서 미리 준비해 두세요.”

방열 대한민국 농구협회 고문은… ●1941년 서울생 ●경복고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학사 ●연세대 교육대학원 체육학 석사 ●한국체육대학교 대학원 박사 ●국가대표 농구선수 ●쿠웨이트 농구대표팀 감독 ●현대남자농구단, 기아남자농구단 감독 ●1982 뉴델리 아시안게임, 1988 서울올림픽 남자농구대표팀 감독 ●가천대 교수, 대학원장 ●건동대 총장 ●대한민국 농구협회장 ●아시아농구협회 부회장 ●가천대 명예교수 ●체육훈장 백마장

송용준 선임기자 eidy01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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