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땅은 근세에 들어서 타락하고 있다. 세계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이 명백하다.” 기원전 2000~3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아시리아 석판에 새겨진 문구라고 한다. 그렇게 오래된 과거에도 사람들이 세계의 종말을 걱정했다는 것이 참 신기하다. 어쩌면 고난의 시기가 왔을 때 등장하는 자조적인 염세주의는 인간 문명의 변하지 않는 특성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전쟁, 사회갈등, 환경오염 등 파멸을 향해 가고 있는 이 답답한 세상에 진정 미래가 있는지 고민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우리의 예상과 달리 세상은 그리 쉽게 망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살길을 찾아내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제7의 봉인>은 인간의 죽음에 대한 영화이지만, 동시에 이 세상의 죽음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죽을 때가 다되어서 자신을 데려가려 온 사신을 피해 도망 다니는 신세다. 극의 시대적인 배경도 흑사병이 유럽을 강타해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던 14세기 무렵이니, 말 그대로 죽음이 온 영화를 뒤덮고 있다.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안토니우스 블로크와 그 일행이 집을 향해 돌아가는 여정을 담은 전형적인 로드트립 영화다. 일행은 여정 중 고향 스웨덴이 흑사병에 의해 처참히 파괴되었음을 확인한다. 사람들은 신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서 스스로를 고문하며 용서를 빈다. 이른바 고행단이다. 그러나 신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는다. 신도 사후세계도 없는 공허한 세상에서 죽음만이 판치고 있다. 이 사실에 블로크는 공포에 질린다.
블로크의 고뇌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종교에 대한 믿음이 갈수록 사라져가고 있는 요즘, 현대인은 삶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세상은 신 없이 그저 단순한 자연적인 법칙에 따라 지배되는 공허한 세상인가? 그동안 전쟁과 학살로 죽임을 당한 수만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은 사후세계로 가지도 못한 채 개죽음을 당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끔찍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가. 공포에 질린 블로크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이쯤 되면 영화가 허무주의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오해다. 오히려 그 정반대로, 이 영화는 또한 죽음 속에서 싹트는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직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광대 요프와 그의 아내 미아가 바로 그들이다.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들은, 스웨덴을 유랑하며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한다. 우울과 절망만이 판치는 세상에 약간이나마 웃음을 주려고 노력하는 이들에게서 남다른 생명력이 느껴진다. 각박해진 사람들은 광대의 공연을 비웃으며 이들을 핍박한다. 하지만 고행단의 끔찍한 자해 쇼에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해준다. 신성한 신의 이름으로 자멸해 가는 사람들과 가장 천한 신분인 광대의 이름으로 계속 살아가려는 요프의 대비가 무척 흥미롭다.
광대 부부는 본능적인 생존을 추구한다. 죽음에 대한 철학적 고뇌에 깊이 빠져있는 블로크와 차별화되는 특징이다. 요프는 갓난아기인 아들, 그리고 아내와 함께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한다. 그렇기에 이들의 모습이 더욱 역동적이고 긍정적이며 희망차 보인다. 영혼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그는, 블로크가 사신과 체스를 두는 모습을 보고는 블로크 일행에게서 조용히 도망친다. 그 덕에 이들은 사신에 의해 블로크와 함께 죽임당하는 운명을 피한다. 블로크의 일행이 사신에게 끌려가는 장면과 그가 화창한 해안가에서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는 장면이 교차하며 극이 끝날 때, 이 영화는 죽음으로 시작하였지만 살아감으로 끝났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화는 실존주의적이다. 그저 묵묵히, 또 희망을 잃지 말고 살라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세상은 그리 쉽게 죽어 없어지지 않는다. 반만년 전의 고대인들이 세상의 멸망을 걱정하였으나, 지금 우리는 이렇게 살아남아 잘살고 있지 않은가. 비록 더럽고 잔인한 세상일지라도, 우리는 광대처럼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그 끝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김동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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