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귀멸의 칼날
하도 인기가 많아, 원작자가 2,000억을 벌고 은퇴했다는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등장인물 전원이 기모노를 입고 등장해 일본풍이 강한, 나쁘게 말하면 ‘왜색이 짙은’ 작품인데도 소위 ‘오타쿠’ 층 외의 일반 한국 대중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다. 특히 인기가 많았던 시즌1은 주인공이 혈귀라 불리는 사람 잡아먹는 괴물들에게 가족을 잃고 훈련을 통해 강해지는 성장기를 다뤘다. 그리고 이런 부류의 성장 스토리에 없으면 서운한 혹독한 스승 캐릭터, ‘사콘지’가 등장한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콘지는 주인공 탄지로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 저러다 죽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들 정도로 끊임없이 시험한다. 그리고 매일 주인공에게 함정이 잔뜩 설치된 산을 하산하는 훈련을 시키며 혹독하게 굴린다. 이런 스승의 행동에는 물론 충분히 공감되는 이유가 있다. 사콘지는 사실 자신이 키워낸 제자들이 오니와 싸우다 죽는 게 너무너무 싫다. 그런 꼴을 보느니, 차라리 제자를 수준 미달로 판명해 싸움터에 안 내보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혹독한 훈련을 시키고, 제자의 인정욕구를 채워주지 않으며, 포기를 장려한다. 이런 스승의 마음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귀멸의 칼날의 사콘지
출처-<당 애니메이션>
이런 유의 ‘가혹한 스승’, ‘제자를 시험하고 쉽게 인정해 주지 않는 스승’ 캐릭터는 대중문화 속에 흔히 등장한다. 주인공이 능력을 키워 성공하는 이야기에 꼭 등장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마디로 ‘클리셰’라 부를 만한 전형적인 캐릭터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전형적인 캐릭터는 ‘사실 누구보다 제자의 목숨을 아꼈던 사콘지’처럼, 겉으론 가혹하지만 속은 따뜻한 인물들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 등을 보다가 이런 유의 스승을 접하면 ‘언젠가 스승이 주인공인 제자를 인정하고 따뜻한 속마음을 내비치는 순간’을 기대하며 스토리를 따라간다. 그런데 이런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는 스승 캐릭터도 있다.
2. 위플래쉬
바로 영화 <위플래쉬> 속의 ‘플레처 교수’다. 플레처 교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따뜻한 속마음’이나 ‘사실은 제자를 아꼈다’는 등의 반전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제자를 몰아붙이고, 몰아붙이고, 또 몰아붙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폭언과 물리적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관객은 가혹한 플레처 교수로 인해 주인공이 성장하고 성공하는 것을 기대하지만, 영화는 그 기대를 철저히 배신한다. 재능 있던 주인공은 결국 플레처 교수 때문에 망가지고, 결국 음악을 포기한다.
<위플래쉬(Whiplash)>, ‘채찍질’이라는 뜻이다. 영화의 제목은 앤드류와 플레처의 관계를 정확히 보여준다. ‘채찍질’은 건강한 사제 관계에는 어울리지 않는 행위기 때문이다. 과거에 말을 달리게 하거나, 노예를 겁주고 빨리 움직이게 하는 데나 쓰이던 게 바로 채찍질 아닌가? 채찍질은 당장 채찍 맞는 대상의 생산성이나 속도를 높이는 건 할 수 있어도, 그를 진정으로 성장시키지는 못한다.
영화 속 앤드류와 플레처
출처-<'위플래쉬' 스틸컷>
이를테면 말을 두고 봤을 때, 그 말을 진정으로 튼튼하고 빠른 말로 만들고자 하는 사육사는 채찍질하는 대신 말을 잘 먹이고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의 운동을 시킬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상대를 계속 몰아붙이기만 할 게 아니라,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꾸준한 연습을 시켜야 한다. 말을 채찍질하듯 몰아붙이기만 하는 것은 단기간에 최대한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나 적합할 뿐, 장기적인 성장에는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영화 <위플래쉬>는 열정적인 스승과 제자가 음악을 사랑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교육’을 명분 삼아 자신의 가학성을 충족시키는 악성 나르시시스트와 그의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다. 실제로 이 영화를 감독한 셔젤 감독은 그렇게 학대를 당해놓고서 플레처에게 돌아가는 앤드류를 두고 ‘스톡홀름 신드롬(‘피해자가 가해자에 감화되어 가해자 행위에 동조하거나 변호하는 현상’)’, ‘학대적 관계로 되돌아가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자신의 영화에 대해 ‘스릴러처럼 연주되는, 재즈 드러머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즉 이 영화는 음악이라는 형식을 빌린 스릴러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출처: 유튜브 채널 'GoldDerby'
어떤 지점에서 위대함은 인간성 상실을 정당화하는가?
(At what point does greatness justify losing your humanity?)
그렇다. 플레처 교수는 분명히 병적인 나르시시스트고, 어쩌면 사이코패스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음악적 성과의 위대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성과가 있었기에 스스로 ‘괴물’이 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스스로 괴물이 되었기 때문에 혹독한 연습을 통해 위대한 성과를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생존이 걸려있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한계를 뛰어넘어 성장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모두가 그런 가혹한 환경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
출처-
사람은 모두 다르다. 어떤 사람은 극한의 상황이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어떤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꺾이거나 다치곤 한다. 가혹한 환경에서 눈부시게 발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따뜻한 분위기에서 격려받으며 훈련했을 때 더 눈부신 성과를 내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누군가 ‘너는 재능이 없어.’라고 독설을 하면 ‘그런 말을 한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도 있지만, 본인이 사실은 재능이 있는데도 ‘나는 재능이 없구나.’ 하며 포기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사람은 모두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교육 전문가도 있는 것이다.
어떤 분야에서 뛰어 사람이 반드시 탁월한 스승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가혹한 훈련법으로 대단한 성공 사례를 만들었다고 해도, 그 훈련법이 다른 제자들에게도 같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최고로 만든 훈련법도, 어떤 이에게는 그를 망치는 가혹한 학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위대함’은 인정해야 하는 가치지만, 그 위대함 아래에서 행해진 가혹한 행위가 있다면, 그것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
<위플래쉬>가 처음 개봉했을 때, 많은 학부모가 이 영화에 열광했다. 이 영화를 학생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학대 행위를 긍정하는 ‘교육 영화’로 받아들인 탓이다. 어느 학부모는 영화관을 나와 언론과 이런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너무 감동적이었다. 교육은 저렇게 해야 한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와는 동떨어진 엉뚱한 감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인터뷰를 한 학부모가 멍청하거나, 자식을 학대하는 학부모라서 영화를 그렇게 해석했다고는 볼 수 없다.
3. 혹독함
‘3당4락’ 3시간 자면 대학에 합격하고, 4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말이다. 입시 준비할 때 많이 들어본 말일 것이다. 대학 간판이 취직을 포함해 많은 것을 결정하는 우리나라에서 고등학교 3년, 길게는 중학교 때부터의 6년은 ‘죽었다' 생각하고 공부만 해야 하는 시기’로 여겨지기도 한다. 누구나 대학 합격 후에 주어질 달콤한 미래를 위해 모든 즐거움을 미뤄놓고 공부만 하라고 얘기를 많이 듣고 자라, 자기 자식이나 후배들에게도 똑같은 소리를 한다. 상대적으로 학교 공부를 덜 하는 예체능 계열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대학에 합격할 때까지 죽어라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고, 운동을 해야 한다. 문제는 이 시기가 청소년들의 가치관이 형성되고 몸과 마음 모두 자라나는 시기라는 점이다. 대한민국 입시제도는 이 시기에 청소년들이 가학성을 학습하게 한다.
출처-<영화 '위플래쉬'>
그래서 우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자기 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학대하고, 잠을 줄여 일을 하거나 능력을 개발하는 일이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생산성을 증대하거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 자신을 학대하고, 또 타인을 학대하는 일이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영화 위플래쉬가 던지는 메시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 싶다.
위대함은 인간성을 잃는 것을 정당화하는가? 자기 학대는 남을 학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성을 잃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위대하다고 여기는 자질과 ‘가학적인 것’을 분리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가혹한 교육에서 위대함이 탄생하기도 하지만, 가혹함이 꼭 위대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천재지만 사이코패스인 가혹한 스승’이 아니라, 우리가 성과를 위해 쉽게 몰아붙인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