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추 디스크와 천식·우울증을 앓는 엄마, 두 번째 생일을 갓 넘긴 여동생. 초등학교 1학년 박유진(가명) 양에겐 챙겨야 할 가족이 둘 있다. 귀여운 캐릭터를 좋아하고, 동요를 부르면서 해맑게 춤추는 건 영락없는 여덟 살 아이. 하지만 엄마 약봉지를 챙겨주고 구토한 걸 치우거나, 여동생 기저귀를 갈고 같이 놀아주는 모습은 여느 또래와 사뭇 다르다.
지난해 12월 17일, 서울 외곽의 한 연립주택에서 만난 유진 양은 "내가 집에 없으면 도와줄 사람이 없어 엄마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지난해부터 어머니 건강이 빠르게 악화하면서 가족돌봄이 익숙해졌다. 한창 돌봄 받아야 할 나이에 가족을 먼저 챙기다 보니 소아 우울 증세까지 나타났다.
경제생활은 꿈도 못 꾼다는 유진 양 어머니는 "너무 큰 애 취급을 하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할 뿐이다. (유진이가) 힘들고 투정부리고 싶은데, 괜스레 감정을 숨기는 것 같아 걱정된다"고 했다. 정부에서 체계적으로 받는 지원은 기초생활수급 정도다. 그나마 지역 복지센터에서 김치 나눔, 정신상담 등의 도움을 받지만, 어린 가장에 놓인 현실을 바꾸긴 역부족이다.
유진 양 같은 13세 미만 가족돌봄아동이 전국에 최대 2만4000여명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린 초등생 200명 중 1명 안팎은 가족돌봄을 떠안고 있다는 의미다. 2021년 대구 청년의 간병 살인을 계기로 '영케어러'(가족돌봄아동·청소년·청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진 뒤 처음 나온 가족돌봄아동 실태 조사다.
6~12세 가족돌봄아동 1.4만~2.4만 추산…첫 조사
2일 중앙일보가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에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 가족돌봄을 전담하는 6~12세 아동은 1만3544~2만4134명으로 추정됐다. 1만3544명은 보수적 추정치, 2만4134명은 최대 추정치다. 각각 6~12세 전체 인구(321만여명)의 0.42%, 0.75% 수준이다.
이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21년 사회보장행정데이터를 활용해 진행 중인 정부 연구용역의 중간 결과다. 장애가 있거나 재난적 의료비 등을 수급하는 가구원이 있고, 이들을 돌볼 어른 구성원이 없을 때 가족돌봄아동으로 분류했다. 이러한 13세 미만 아동은 경기-서울-경북 순으로 많았다. 해당 가구의 기초생활보장 수급 비율은 32.1%에 그쳤다.
현재 가족돌봄아동을 비롯한 영케어러에 대한 명확한 법적 규정은 없다. '아픈 가족에 대한 돌봄 책임을 전담하고 있는 청소년·청년' 등으로 정의하는 정도다. 이들을 지원할 별도 법안은 국회 문턱을 아직 넘지 못했다. 간병 살인 이후 정부 차원의 조사나 각종 지원이 늘어났지만, 한계가 여전하다는 걸 보여준다.
법안 없고, 정부 지원 밀려…13세 미만 '사각지대'
특히 13세 미만 아동이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정부는 앞서 청소년·청년층인 13~34세 영케어러 실태조사 결과만 공식 발표했다. 이들 규모는 해당 연령 인구의 1.3%인 15만여명(2020년)으로 추정된다. 막 기지개를 켠 장기요양서비스·장학금 연계, 돌봄비 지원 등 정부 지원책도 청소년·청년 중심이다.
지자체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례상 영케어러 연령은 서울시 9~34세, 강원도 14~39세 등 제각각이다. 독자적인 사업 추진도 미미하다. 아예 법으로 '18세 미만' 아동으로 못 박은 영국 등 해외 주요국과 대조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뒤늦게 6~12세 '어린 가장' 실태를 파악하고 나선 것이다. 통계에 제대로 잡히지 않는 취약 가구를 고려하면 가족돌봄아동은 이번 추정치보다 많을 가능성도 있다. 강선우 의원은 "가족돌봄 노동에 내몰린 어린아이들은 자신을 '가족돌봄자'라고 인식하지 못해 정부나 지역사회에 도움을 요청하지 못 하는 게 현실"이라고 밝혔다.
3명 중 1명, 5년 이상 돌봄…'경제적 어려움' 최다
경기 안산 반지하 집에 사는 초등 4학년 김준희(가명) 군도 돌봄과 집안일을 떠안고 있다. 우울증이 심한 어머니를 대신해 7살, 3살 남동생을 챙기는 경우가 많다. 지난 12월 19일 만난 준희 군에게 할 줄 아는 요리를 물어보니 어른 못지않았다. "김치볶음밥, 계란말이, 된장찌개…." 동생들 밥을 챙겨준 뒤엔 설거지 등 집안일도 한다고 했다. 준희 군은 "누가 집안일을 해주거나 동생들을 챙겨줬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누적된 돌봄 부담 때문일까. 준희 군은 평소 심리 불안으로 손·발톱을 심하게 뜯는다. 어머니는 "준희의 정서적 불안 증세가 심해 지역 복지관에서 미술 치료를 받고 있다"면서 "평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들었다. 내가 아픈 모습을 보기 싫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어린 가족돌봄아동의 조기 발굴, 해당 가정에 대한 맞춤형 지원이 누구보다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초록우산이 지난해 10~24세 영케어러 186명을 조사한 결과, 5년 이상 가족돌봄을 맡았다는 비율이 3명 중 1명(35.5%)꼴이었다. 최근 1년간 경험한 어려움(복수응답)은 경제적 어려움-화가 나거나 좌절감-학교생활 어려움 순으로 많이 꼽았다.
"어릴 때 돌봄하면 학업·친구도 소홀, 큰 짐으로"
이들에게 삶의 만족도를 물었더니 평균 5.9점(10점 만점)에 그쳤다. 일반 아동·청소년은 6.9점이었다. 하루 2시간 미만 공부한다는 비율도 절반 넘는 58%로 일반 아동·청소년(36.6%)보다 크게 높았다. 가족돌봄 기간이 더 빠르고, 길어질수록 성장 과정에 큰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김승현 초록우산 아동옹호본부장은 "초등 저학년 때부터 가족돌봄을 맡으면 학교생활에 집중하기 쉽지 않다. 집에서 간병·집안 등을 하다 보면 학업에 쏟을 시간이 줄어들고, 친구 관계 등도 소홀하기 쉽다"면서 "심리적 문제도 적지 않은 만큼 말 그대로 전방위적 어려움을 빠르게 겪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소연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영케어러 돌봄 부담 정도를 측정했더니 20대 청년과 어린 초등학생이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만큼 정신적·신체적 발달이 덜 된 어린 아이들에겐 가족돌봄이 큰 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면서 "보건복지부·교육부·여성가족부가 부처 칸막이를 허물고 가족돌봄아동 발굴부터 지원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