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돌보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게 해선 안 된다. 다른 아이들처럼 성장하는 데 지장을 줄 수 있다."
영국 국가보건서비스(NHS)가 규정한 ‘영케어러’(가족돌봄 아동ㆍ청소년)의 권리다. 외국에선 이처럼 가족을 돌보는 아동ㆍ청소년에 대한 지원을 법제화하는 한편 가급적 또래와 유사한 성장기를 보낼 수 있게 지원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관련 법률조차 없는 ‘무대응 국가’에 머물고 있다.
영국은 2014년 아동·가족법, 돌봄법에 18세 미만 아동에 대한 지원을 명시했다. 이에 따르면 지역 정부는 도움이 필요한 가족돌봄아동의 실태를 파악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울러 "영케어러가 성인 보호자가 할 일을 대신하게 하지 말라"는 식으로 가족돌봄아동의 돌봄 범위를 명확히 했다. 예컨대 아동이 직접 돌보는 가족 구성원의 용변을 처리하거나 목욕시키는 일을 맡지 않도록 정부 등이 적절한 지원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외국, 법에 '아동 지원' 못 박아…혜택 카드 발급도
호주는 2010년부터 시행된 법을 기반으로 25세 미만 영케어러를 지원한다. 학교·지역사회와 연계해 드러나지 않는 가족돌봄아동을 찾는 체계를 만들었고, 12~25세에게 연 3000호주달러(약 270만원)의 학비 보조수당을 지급한다.
아일랜드는 해당 아동을 직접 면담한 매니저가 맞춤형 서비스를 주선한다. 10~24세에겐 무료로 '영케어러 카드'를 발급하는데, 도서 구매, 여가·운동 시설 이용 시 할인 혜택을 받는 식이다. 영국·호주·오스트리아 등은 가족돌봄아동이 전문 기관과 연결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도 운영한다.
전문가들은 한국도 관련 법률 마련에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현재 국회엔 가족돌봄아동 관련 법안 10여건이 발의돼 있다. 법안은 취약청년 보호부터 가족돌봄아동 지원까지 다양하다.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만 13세 미만 가족돌봄아동의 발굴·지원을 명문화했다. 김미애 국민의힘 의원의 발의안은 가족돌봄청소년·청년을 국가의 지원 대상으로 명시했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지자체가 조례를 근거로 진행하는 사업은 불안정한 만큼, 중앙 정부가 개입할 법률이 있어야 가족돌봄아동을 안정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며 "이들의 조기 발견과 정부·지자체의 빠른 개입을 위해 법 제정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법상 연령 하한 없어야, 가사서비스 등 맞춤형 지원"
또한 연령 하한을 두지 말자는 제안도 이어졌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한국에서 13세 미만 아동은 지원의 사각지대에 있다. 일생을 좌우하는 성장 기회가 박탈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라고 밝혔다. 일부 지역에서 시범 실시하는 간병·요양 등 돌봄서비스와 가사서비스 제공, 문화비 지원, 커뮤니티 형성 등을 확대해 아동·청소년에 맞는 맞춤형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명숙 상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전 한국아동복지학회장)는 "영케어러가 대체로 어릴 때부터 돌봄을 맡는다는 점을 고려해 아동·청소년·청년 등 생애주기별로 필요한 욕구·특성에 맞춰 지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봉주 교수는 "생계비뿐만 아니라 돌봄 수당 등을 지원하는 것도 검토하자"며 "아울러 아동·청소년의 돌봄을 받는 부모에 대한 취업 지원, 정신상담도 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