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대부분 죽을 때까지 두려움이라는 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한 생을 보낸다. 많은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으니, 두렵지 않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런 사람도 잃을 게 하나 더 있다. 그게 바로 목숨이다. 목숨, 태어나는 순간부터 목에 숨이 붙으면서 인생이 시작되고 그 목의 숨을 부지하려고 한 생을 바둥거리다 그 숨이 떨어지는 순간 생이 끝난다. 다시 말하면 숨을 붙이는 순간 두려움이 시작되고 그 두려움은 숨이 떨어져야만 끝난다. 그렇게 두려움은 죽음의 다른 이름이다. 너무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살아있는 내내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데리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 그리고 이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포장하고 있는 두려움의 껍질 중 하나가 ‘늙음’이다.
하지만 늙기 때문에 죽음에 이른다는 생각은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의사이며 명상가인 디펙초프라는 모든 생명이 있는 것들은 그렇지 않은데 인간만이 노화현상을 인식하는 유일한 신경계를 소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늘 죽음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천 년 된 은행나무는 스스로 늙는다거나 그래서 죽게 된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두려움이라는 정신적 작용이 없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죽음의 공포 없이 죽음에 이를 수 있다면 인간은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존재가 될 것이다. 여행하는 동안 내내 웃으며 즐겁게 보내다 집으로 돌아가듯이, 말하자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소풍을 끝내고 즐거웠다며 하늘로 가는 어떤 시인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인생이라면 정말 행복하지 않겠는가.
늙는다는, 죽음이라는 두려움의 정신적 작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명상이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그것은 주변의 모든 것에 끌려다니는 사고에서 벗어나 역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이끄는 사고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과 느낌으로 자신의 신체 상태를 바꿀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생명체라고 한다. 노화현상을 인식하는 유일한 신경계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정신적 상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에 영향을 끼친다고 하는데 명상은 바로 이런 것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어떤 계기로 아난다마르가 수행공동체를 접하게 되어 십여 년 명상을 해오고 있는데 명상은 고도의 정신적 집중이 필요한 것이어서 그것만으로도 의식이 고양되어 삶의 강한 자신감과 활력을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명상을 통해 마음을 집중하면 몸속에 있는 각각의 세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몸의 세포들은 우리의 생각들을 낱낱이 엿듣고 있어서 그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므로, 내 몸이 시간과 함께 쇠퇴해 간다는 생각 대신 시시각각 새로워진다는 신념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인체는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지는데 피부는 한 달에 한 번씩 새롭게 교체되고 위벽은 5일마다, 간은 일주일마다, 골격은 3개월마다 새롭게 바뀐다고 한다. 그러니 몸은 매일 새로워진다는 것을 생각하며 삶은 현재에 고도로 집중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 여기’를 산다는 말에 근접한 것이기도 하다. 존재의 근본을 덮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껍질을 벗을 수 있는 것은 부귀영화를 뒷받침하는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정신, 마음 하나에 달린 것이다. 불가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박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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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라는 껍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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