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일을 겪고 보호자와 찾아온 분이 있다. 눈도 잘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보호자가 툭 치며 말한다. “빨리 속에 있는 걸 다 털어놔야 해. 그래야 좋아지지.…”
첫 진료가 끝나고 두 달이 지나도 여전히 말을 잘하지 않는다. 부모나 배우자가 내게 물어본다. “선생님이 말을 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안에 있는 걸 다 뱉어내서 비워야 좋아지는 거잖아요.”
한시라도 빨리 말로 다 표현해야 좋아지는 것일까?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 억압되어 꽉 차 있을 때 타인에게 말하면 시원하고 후련하다. 환기 효과 덕분이다. 심리상담 문턱이 낮아지고 일반화되면서 큰 사건을 겪어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가급적 빨리 상담을 받아보라고 권하는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만들어졌다. 바람직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게 언제나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때에는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2003년 미국 하버드대 리처드 맥널리 심리학과 교수 등은 위기상황 이후 응급상담 효과를 분석했다. 2001년 9·11 사건이 터진 직후 9000여명의 카운슬러가 뉴욕시로 달려가서 피해자, 가족, 구조대원에게 상담을 제공했다. 미증유의 사건을 경험한 이들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걸릴 위험을 예방하려는 목적이었다. 우려와 달리 대다수 관련된 사람들은 처음에는 매우 힘들어했지만 바로 회복이 되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치료를 받은 사람들은 도움이 되었다고 했지만 치료를 받지 않은 사람과 비교할 때 그 결과에서 차이가 나지 않았다. 경우에 따라 회복이 더뎌진 사례도 있었다. 다른 조사를 보면 9·11 사건 직후엔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진단을 받을 만한 사람은 7.5%나 되었지만 6개월 후에는 0.6%만 남았다. 압도당할 만한 심한 일을 경험했다고 모든 사람이 회복되지 못할 정신적 외상을 입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회복하고, 과거에 비해서 더 강해진다. 외상후 성장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 내 마음속 감정과 생각을 밖으로 꺼내놓는 것은 후폭풍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다친 곳을 제거하기 위해 수술을 하려면 상처를 여는 것보다 무균처리가 된 공간을 확보하고, 수술 후 안정을 취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다. 아무리 수술을 잘해도 이런 준비가 없으면 결과는 좋을 수 없다. 감정 처리도 마찬가지다.
내 안에 미지의 상처를 드러내고 보여주는 것은 동시에 내가 그 마음을 직접 바라봐야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드러냈을 때 견뎌낼 자신에 대한 믿음, 또 상담할 상대와 관계에 대한 신뢰가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면 섣부른 내뱉음은 감당하기 힘든 후회, 죄책감으로 범벅이 되어 소화하기 어려운 고통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내뱉은 말은 되돌리기 어렵고, 실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녹아 없어졌을 수도 있을 일이 반짝이는 바늘 꾸러미가 되어 손바닥 위에 놓인 채 움직일 때마다 고통을 준다. “다 털어놔야 좋아져”라고 조언하는 게 위험한 이유다. 일이 일어나고 난 다음,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순간이 올 때 상담이 비로소 도움이 된다. 그 순간이 안 오고 끝나면 더 좋다.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고 해서 평생 해결되지 않은 아픔을 갖고 살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에서 경험하는 불행한 사건들은 시간이라는 약이 도포되어 서서히 내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서 옅어지고, 결국 흔적만 남게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내가 겪은 외상적 사건보다 더 강하고 건강하다고 여기는 마음을 가졌으면 한다.
그래서 나는 아직 말할 준비가 안 된 분에게 “꼭 다 말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할 이야기가 생기면 언제든지 오세요”라고 말한다. 12·29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가족들에게도 들려드리고 싶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