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축제의 계절. 이런 생각이 든 건 부산국제영화제 가는 길에 KTX 좌석에 놓여있는 잡지를 뒤적이면서다. 강릉 누들축제, 양양 송이연어축제, 풍기 인삼축제, 강진만 춤추는 갈대축제, 포항 스틸아트페스티벌, 고령 세계현페스티벌… 10~11월 방방곡곡 이렇게 축제가 여럿 열린다는 데 새삼 놀랐다. 폭염이 지독했던 여름을 겪은 터라 어디서든 이 귀한 가을을,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축제의 흥을 만끽하기 권하고픈 마음이 저절로 든다.
그중에도 영화제는 물리적으로 닿기 힘든 세상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기회. 물론 치열한 예매전쟁을 거쳐 티켓을 확보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일본 홋카이도에서 아이누의 전통과 수렵방식을 되살리며 살아가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의 친밀한 일상(영화 ‘아이누 푸리’), 미국의 남북전쟁 시기 각기 다른 이유로 입대한 군인들에게 불현듯 다가온 고요의 순간(영화 ‘버림받은 영혼들’), 19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음악에 뛰어난 재능과 열정을 발휘한 고아 출신 여성들의 신나는 일탈(영화 ‘글로리아’) 등을 그렇게 지난 주말 이틀 동안 부산에서 만났다. 훌륭한 화가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방법을 보여준다. 뛰어난 영화들도 종종 그렇다. 마침 세 영화 모두 각기 다른 국적의 감독들이 모두 부산에 왔다. 상영 직후 감독들의 말로 저마다의 뚜렷한 철학과 동기를 듣는 것 역시 영화제의 관람을 완성하는 체험이다.
특히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향후 일반 극장가에 개봉한다면 필견의 추천작이 될 것 같다. 이란에서 한창 히잡 착용 관련 시위가 벌어지는 와중에 한 가족 안에서 벌어진 뜻밖의 일로 신뢰가 흔들리는 과정이 스릴러 영화 뺨치는 긴장과 함께 펼쳐진다. 부산 방문이 처음인 모함마드 라슬로프 감독이 들려준 영화 구상의 계기도, 언뜻 투사와는 거리가 먼 듯한 그의 차분한 말투도 인상적이었다. 이 신작의 완성 직전, 그는 앞서 만든 영화로 8년의 징역형이 확정되었고 결국 고국을 탈출했다.
부산이 이런 만남의 무대가 되어온 지도 29회째. 사람으로 치면 내년에 서른이다. 영화제만 가면 나이 타령을 하게 되는 건, 한국사회의 평균 혹은 중위 연령보다 훨씬 젊은 관객들로 영화제 객석이 가득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다 다큐 ‘영화 청년, 동호’를 보면서 뜻밖의 대목에 꽂혔다. 1회부터 15년간 영화제를 이끈 김동호 전 집행위원장이, 한국에서도 국제영화제를 해보자는 30대 청년들의 요청에 함께하기로 했을 때가 59세였다는 대목이다. 영화제가 거쳐온 길, 가야 할 길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새로운 영화, 새로운 감독, 그리고 사람은 바뀌어도 꾸준히 젊은 열정으로 가득한 관객과 나이로만 규정할 수 없는 영화 청년들이 답할 몫일 테니. 국고 지원이 줄어든 와중에도 이번 부산국제영화제가 집계한 전반부 좌석점유율은 90%가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