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가 바뀌면 금산사에 간다. 올해는 18개월 된 딸을 처음으로 데리고 갔다. 거대한 미륵입불과 화려한 단청에 시선을 빼앗기고 “우와”를 연발하는 모습이, 말은 서툴러도 아름다움은 아는 것 같아 기특하다. 앞으로는 연례행사처럼 매년 함께 올 예정이다. 마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하, <빼들봄>)의 권례가 딸 숙이와 함께 금산사를 자주 찾았듯이.
숙이의 원래 이름은 해송이었다. 숙이가 태어나기 전, 권례의 꿈속에서 한 소년이 보살과 나타났다. 보살은 소년의 이름이 ‘해송’이며, 속죄를 마치고 윤회하게 되었다며 권례에게 소년을 안겨주었다. 가족들은 아들이 태어나리라고 철석같이 믿었지만 태어난 건 딸이었다. 보살이 지어준 이름 ‘해송’은 몇 년 후 태어난 남동생에게 돌아갔다. <빼들봄>은 1970년대를 배경으로, 가부장제의 부조리한 폐해 안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여성 인물들의 서사를 다룬다. 일견 이분법적으로 보이는 갈등 구조는 시즌이 이어지면서 복잡한 양상을 띈다. 손자에게 자아를 의탁한 채 숙이를 증오하던 할머니의 이면에는 서당에 다니고 싶었던 소녀가 있었음이 밝혀진다. 숙이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것처럼만 보이던 남동생은 ‘계집년보다 성적이 안 나오면 그게 사람이냐’며 아버지에게 구타를 당한다. 역설적으로, ‘계집’이라는 이유로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는 것이 꿈인 숙이가 필남을 향해 “얼마나 마음이 추잡하길래 여자가 이런 말과 행동을 하지?”라고 생각할 때 <빼들봄>의 서사는 빛이 난다. 여기에 영웅이나 완벽한 인간은 없다. 굴레 앞에서 분노하고 절망하거나, 굴레인 줄도 모르고 살아왔던 보통의 여자들만이 있을 뿐이다.
<빼들봄>에서 인물 간의 언어가 서로에게 명확히 번역되지 않고 자꾸만 굴절되는 것은 그 굴레가 교묘하게 갖은 형태로 얽혀있기 때문이다. 중학교에 다니는 숙이와 진학하지 못하고 ‘공순이’가 된 미자의 언어가, 상처만 입고 자란 탓에 소통에는 서툰 필남과 그런 필남에게 선입견을 가진 숙이의 언어가 충돌한다. 숙이가 가사보다는 공부에 집중해서 더 높은 곳으로 훨훨 날아가길 바라는 권례와, 그런 엄마에게 몰아붙여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숙이의 언어도 부딪히기는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세계의 언어가 깨진 파편이 되어 그들을 아프게 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이내 위로의 몸짓을 건넨다. 숙이는 미자의 멍든 팔을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고, 필남은 그녀의 수첩을 태우게 된 것을 사죄하러 온 숙이의 어깨를 다독인다. 그 몸짓은 미약하지만 끊어지지는 않을 위로와 유대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 눈물의, 토닥임의 온기가 모이고 또 모이면 언젠가 봄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얼음장 같은 굴레는 녹아버리고 권례와 숙이는-아니 해송은 마침내 웃는 얼굴로 명부전의 지장보살 앞에 설 수 있으리라.
주말에 친정 엄마를 모시고 딸과 함께 덕진공원에 마실을 나갔다. 연화정 도서관에서 덕진호를 바라보며 나는 숙이와 지민을 생각했다. 연꽃이 필 계절은 진작에 지났지만, 어딘가에서 담소를 나누는 그들을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전 웹서핑을 하다가 <빼들봄>은 예전의 이야기일 뿐, 지금 시대에 통용되는 서사는 아니라고 평한 글을 떠올렸다. 글쎄, 오늘의 숙이와 지민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들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것은, 노을빛이 책을 읽는 엄마의 옆얼굴에 가는 빛무리를 만들었을 때였다.
박근형 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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