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래 꿈은 ‘상사맨’이었습니다. 드라마 미생 속 모습처럼 상사에서 글로벌 사업을 맡아 키우는 걸 하고 싶었죠. 이스트소프트(047560)에서 개발자로 시작한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개발자도 재미있었지만 이제는 경영의 맛을 느끼고 있습니다.”
알집·알약 등 ‘알’ 시리즈로 국내 소프트웨어 시장의 대표 주자로 성장한 이스트소프트는 27년 차 ‘직장인 신화’를 일군 정상원(사진) 대표가 이끌고 있다. 이직이 잦은 정보기술(IT) 업계에서는 보기 드문 사례다. 1998년 병역 특례 요원으로 입사한 정 대표는 이제 완숙미를 갖춘 9년 차 최고경영자(CEO)로 성장했다. 정 대표는 인공지능(AI) 기업으로의 변신을 선언한 이스트소프트의 제2 전성기를 준비하기 위해 여전히 분주하다. 서울 서초구 이스트소프트 사옥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난 정 대표는 “회사의 모토인 ‘직관적인 편리함’을 바탕으로 즉각적인 효용을 낼 수 있는 기술을 발굴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병특 요원’이 일군 이스트 신화=정 대표가 이스트소프트를 직장으로 택한 것은 순전히 우연에 가까웠다. 서울대 수학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병역 특례로 군 복무를 대체하기로 마음먹고 회사를 수소문했다. 하지만 정 대표가 병역 특례 업체를 찾던 1998년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의 칼날이 몰아치던 시기로, 경기가 워낙 나빠 업체들이 사람을 뽑으려 하지 않을 때였다. 그는 “하이텔·천리안 게시판에서 병역 특례 업체를 찾고 있었는데 당시 구인 글이 올라온 곳이 딱 세 곳뿐이었다”며 “세 곳 다 어딘지도 모르는 회사였지만 그중 이스트소프트의 면접 시험 문제가 가장 어려웠다. 1주일 동안 날밤을 새워가며 풀면서 자연스럽게 이 회사로 오게 됐다”고 회상했다. 정 대표를 낚아챘던 당시 면접 시험 과제는 노트패드 프로그램 만들기. 과제를 냈던 것은 이스트소프트의 창업주인 김장중 회장이었다. 정 대표는 “(결과물을 받아본 회사에서) 저를 안 뽑을 수 없었을 것 같다”고 웃으며 당시를 떠올렸다.
막 성장의 닻을 올리기 시작한 벤처기업에서 정 대표는 금세 두각을 나타냈다. 정 대표는 “병역 특례 복무 중이던 1999년도에 알집이 출시되면서 회사가 성장세를 탔다”며 “여기에 제가 만든 제품들로 매출이 발생하고 회사가 성장하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김 회장님도 전략을 잘 짰던 것이, 승진을 자주 시켜줬다”고 했다. 병역 특례로 입사한 지 6년 만에 정 대표는 이사 자리에 올랐다.
이스트소프트에서 자리를 잡은 뒤 정 대표가 가장 중점을 뒀던 것은 회사의 개발 문화 개선이었다. 그는 “그 당시 우리나라의 개발 문화가 굉장히 후진적이었다. 회사의 개발 문화를 최고로 만들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다”며 “당시 최고의 소프트웨어 회사로 꼽히는 곳들을 찾아다니고 강연을 들으면서 선진 기법을 발굴했고 이스트소프트의 신입 교육이나 회사 내의 프로그래밍 관리 등에 선제적으로 도입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스트소프트의 프로그래머들은 정말 제대로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말이 돌았다. 그런 체계를 만드는 데서 재미를 찾았다”고 덧붙였다. 개발자로서 역량을 키워가던 그의 손에서 회사의 대표작인 ‘알툴즈’의 상당수 히트작이 탄생했다. 그는 “알툴즈에서는 알송(음악 재생 프로그램)부터 책임지고 만들었다”고 했다.

◇‘직장인 신화’ 일군 CEO…“AI로 승부수”=개발자로 커리어를 쌓던 정 대표의 직장 생활에 전환기가 찾아온 것은 2005년이다. 회사의 개발실장으로 실무를 책임지던 그는 이 시기부터 사업 영역으로 발을 넓히면서 경영자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프로그래밍이 재미있어서 정신없이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는데, 이즈음 ‘이게 원래 내 목표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이때부터 개발 비중이 줄고 경영 업무가 늘어났다”고 전했다.
경영에서도 능력을 입증한 정 대표는 2016년 1월 창업주 김 회장의 뒤를 이어 이스트소프트의 대표 자리에 올랐다. 취임 직후부터 AI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감한 그는 AI 서비스를 주력으로 삼기 위한 체질 개선을 담은 ‘비전 2025’를 발표했다. 정 대표는 “AI는 회사의 다음 비전을 위해 우리가 꼭 가져야 할 도구라고 생각했다”며 “사용자를 대상으로 서비스를 해왔던 회사의 강점을 살려서 즉각적인 효용을 이룰 수 있는 분야에 집중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이 같은 분석에서 나온 전략이 ‘실용주의 AI’다. 지나치게 복잡하고 장기적인 투자가 필요한 사업 대신 당시 존재하는 기술을 중심으로 서비스를 개발하는 데 집중했다. 이렇게 나온 대표적인 서비스가 증강현실(AR) 안경 피팅 앱 ‘라운즈’다.
실용주의 관점에서 AI 사업을 고민해온 이스트소프트는 지난해 5월 AI 휴먼 서비스인 ‘페르소닷에이아이(RERSO.ai)’를 글로벌 출시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AI로 동영상 콘텐츠 생성, 실시간 대화·번역, 비디오 자동 더빙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정 대표는 “AI로 사람과 인터랙션(상호작용)할 수 있는 서비스”라며 “생성형 AI 붐과 맞아떨어지면서 수요가 크게 늘었다. AI로 매출을 일으킬 수 있는 시장이라는 판단이 들어맞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페르소닷에이아이는 출시 9개월 만에 가입자 8만 명을 넘었는데 이 중 70%가 해외 이용자다. 매출 또한 국내외에서 고루 발생하고 있다. 올해는 서비스형소프트웨어(SaaS) 중심의 글로벌 확장 전략을 앞세워 흑자 전환을 기대하고 있다. 그는 “교육 사업이 AI와 잘 맞는다. 3년째 서비스 중인 이 분야에서도 올해 100%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덧붙였다.
◇인문학으로 경영 답 찾아=정 대표는 독서를 통해 경영자로서의 불안감을 씻어냈다고 했다. 개발자에서 경영인으로 전환하는 시기, 그는 ‘총·균·쇠’를 읽으면서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간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정 대표는 “2007~2008년쯤 ‘알약’이 대박을 쳤는데 생각보다 매출이나 투자로 연결되는 게 작았다”며 “우리 회사가 미국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궁금증, 왜 우리나라는 글로벌 시장에서 더 커지지 못하는가 하는 의아함이 생겼다. 그 답을 내려준 게 이 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수학 전공자들은 체계적인 게 아니면 답답해하는 성향이 있다”며 “경영을 하면서 생각의 기초를 다시 닦으려고 했는데 인문학이 큰 도움을 줬다”고 덧붙였다.

인터뷰를 진행한 정 대표의 집무실 책장에는 특히 일본 관련 책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일본 대하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만화판 전집이 눈에 띄었다. 정 대표는 “(일본을 통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한마디로 표현하면 ‘참을 인(忍)’이지 않나. 저 또한 잘 참는 편이다 보니 공감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일본 주요 기업 경영자들의 각기 다른 경영철학을 소개한 ‘일본 최강의 경영자들’에 대해서는 “목차에 각 회사들을 한 줄로 규정한 표현들이 나와 있다. 우리 회사는 한 줄로 뭐라고 쓸 수 있을지 궁금해서 일부러 사서 읽어봤다”고 했다. 이스트소프트의 ‘한 줄 소개’를 뭐라고 하면 좋을지 묻자 “직관적 편리함”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알툴즈부터 시작해서 직관적 편리함에 정말 많이 집중했고 지금도 아주 예민하게 보고 있다”고 말했다.
정 대표는 경영자로 돌아선 뒤에도 여전히 프로그래밍의 ‘손맛’을 잊지 못했다. 최근 취미를 묻자 그는 “요새 프로그래밍을 취미로 다시 하고 있다”며 “얼마 전에 보이스 커맨드로 작업을 수행하는 앱을 만들었다. 챗GPT를 활용하니 시간이 엄청나게 절약돼서 1주일도 안 걸렸다”고 설명했다. 정 대표는 “경영은 너무나도 신경 쓸 게 많고 복잡한데 오랜만에 개발에 집중을 하니까 좋더라”며 웃었다.
he is… △1975년 △마산중앙고 △서울대 수학과 △2013년 줌인터넷 부사장 △2016년~ 이스트소프트 대표이사 △2021년~ 한국소프트웨어산업협회 서비스혁신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