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내 생각의 묵은 껍질 벗기는 언제 어디서나 작동했다. 가령 세상을 향한 비굴한 나를 발견했을 때도 작동했다. 나는 누구에겐가 당하고 비굴한 채로 살아갈 수 없었다.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이다. 비굴한 나를 비굴하지 않는 나로 바꾸려 할 때 내 내면에서는 오랫동안 싸움이 벌어진다. 비굴할지라도 안전한 삶을 도모하려는 나와 위험에 맞닥뜨리더라도 비굴을 벗어나려는 나의 싸움은 아픈 묵은 껍질 벗어던지기였다. 인간 삶의 역사는 생각의 묵은 껍질 벗기에서부터 시작되었을 터이다.
‘항심(恒心)이면 항산(恒産)이고 항산이면 항심’이라는 말이 있다. 항상 희망 없는 옛 껍질을 벗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그 생각을 머리에 굴리는 사람은 늘 그 묵은 껍질을 벗어던지는 사람이고, 늘 묵은 껍질을 벗고 새로운 얼굴로 삶을 사는 사람은, 항상 묵은 껍질을 벗으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농기계가 발달하지 않은 1950년대 후반에 나는 고향 시골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가 하던 김 양식과 농사를 물려받아 지으며 살고 있었다. 가을철 고구마를 캘 때는 품꾼들하고 함께 호미로 작업을 했다. 다음 해부터 나는 그걸 개선했다. 어머니가 고구마에 상처가 난다고 싫어했지만 소를 이용하여 쟁기로 갈아서 고구마가 하얗게 뒤집어지게 해놓고 품꾼들에게 주우라고 했다. 일이 배 이상으로 빠르고 쉬웠다.
그것은 묵은 껍질을 벗고 새 길, 능률 있는 새 방법을 찾아 일하기였다. 나는 이웃들에게 쉽고 편한 빠른 방법을 찾아 일을 보다 더 능률 있게 하도록 권하곤 했었다.
요즘 농어촌에 청년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늙은이들만 있다. 아기 울음소리가 끊어진 지 오래이다. 가임 여성을 찾아볼 수 없다. 남녀들 중 가장 젊은이가 환갑이 넘은 사람들이다. 자연 인근의 초등학교들이 문을 닫는다. 농어촌 이 마을 저 마을 가운데 인구소멸지역이 늘어가는 현실이다. 젊은이들은 도시로만 나가려 하고 농어촌에 머무는 것을 꺼려한다. 농어촌에 산다는 것은 미래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탈피(脫皮)’는 옛 껍질을 벗는다는 말이다. 탈피는 성장하고 관계된 말이다.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은 어둠의 꺼풀을 한 가닥씩 벗는 것이다. 어둠은 미망(迷妄)인데 미혹에 빠져 사는 삶을 말한다.
참게나 꽃게는 성장하려면 철갑같이 단단한 껍질을 벗어야 한다. 껍질을 벗지 않고는 성장할 수가 없다. 한데 껍질이 철갑처럼 단단한 게들이 껍질을 벗는다는 것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한다는 것이다. 껍질을 벗으면 온몸이 부드러워지고 약해져서 포식자에 잡혀 먹힐 수도 있고, 물 온도의 변화에 생체 리듬이 깨져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위험을 무릅쓰고 껍질을 벗지 않으면 성장할 수가 없다. 껍질을 벗고 있는 동안 그 게는 포식자에 잡히지 않도록 숨어 살아야 한다. 추위와 더위에 노출되지 않아야 한다. 은신해 있는 동안 속살처럼 부드러워진 껍질이 철갑처럼 단단하게 굳어지기를 기다려야 한다.
사람도 좀더 잘 살기 위해서는 묵은 껍질을 벗고 새 모습으로 살면서 새로 보람된 세상을 열어 가야 한다. 묵은 껍질을 벗는 동안에는 경제력이 약하고 버티는 힘이 약해진다. 그렇지만 새로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묵은 껍질을 벗고 연약해지는 기간을 잘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유치원 다니면서 입었던 옷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벗어던지고 새 옷을 입고 새 마음으로 공부해야 한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는 초등학교 때 입었던 옷을 버리고 새 옷 새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대학교 다닐 때는 고등학교 시절 입던 옷, 그때의 버릇들을 버리고 더 차원 높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어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어른이 될 공부를 해야 한다. 또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장경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옷을 입어야 하고 거기에 적응해야 한다.
농어촌에서의 삶도 그러할 터이다. 전통적인 벼농사 한 가지만 소규모로 짓다가는 가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소를 키우거나 닭이나 오리나 염소를 키우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온실 시설하우스를 이용하여 특용 작물을 재배하거나 생산한 것을 인터넷을 통해 판매하여 소득을 높이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옛 껍질을 탈피한다는 것은 현기증 나게 흐르는 오늘의 정보사회 속에 적응할 수 있도록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고 자기가 속해 있는 세상을 선도해 나간다는 것이다. 외국 여행을 한번 하더라도 목적성 있는 여행을 하고 그곳의 특용작물을 가져다가 재배를 하는 것이고 빠른 유통방법을 배워다 사용하는 것이다.
농촌이든지 산촌이든지 어디에서 살거나 거기에서 새 길을 열어 사는 것이 옛 껍질을 벗는 것이다. 미래의 희망이 없다고 모든 사람들이 버리고 떠나가는 농촌에서 새 희망, 새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가져볼 일이다.
노인들만 남아 있고 빈 토지, 빈집들이 늘어나는 산촌에 뜻밖의 미래 희망이 잠재해 있을 수 있다. 집과 토지들을 싼값에 구할 수 있고, 자동차문화가 발달한 데다 지방자치단체의 도움을 받아 농기계들을 임차할 수 있고, 거기에 젊음과 부지런함과 땀만 보태진다면 새로운 참 삶의 길을 열 수 있지 않을까.
도시에서 위태로운 배달업, 일일 막노동 등은 미래의 희망이 없는 머슴살이일 뿐이다. 그보다는 내 사업을 보람차게 할 수 있는 농산어촌에 나의 모든 것을 투자하고 거기에 운명을 걸어본다면 승산이 있지 않을까.
망아지는 낳으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옛말은 하나의 묵은 껍질일 수 있다. 내가 미래의 희망이 있다 싶은 곳이 나의 꿈의 터전인 서울일 수 있다. 나는 어지러운 서울에서 머슴살이하듯 살다가 시골로 돌아와 억대 이상의 소득을 올리고 사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아오는 터이다. 자세히 알고 보면 그들은 늘 탈피를 꿈꾸는 사람들이었을 터이다.
한승원 소설가
한승원 소설가는?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 소설가는 1939년 전남 장흥 출신으로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대한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아제 아제 바라아제’ 등 많은 작품을 집필했다. 한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의 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