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버터] 다르게 부르기

2025-10-15

편집장 칼럼

김시원

더버터 편집장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육원 퇴소 청년을 ‘보호종료아동’이라고 불렀다. 종료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인상과 단절의 뉘앙스가 문제로 지적되면서 용어를 바꿔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됐다. 보육원 퇴소 청년들은 여전히 사회가 지원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이라는 의미에서 ‘자립준비청년’이라는 말로 대체됐다. 명칭만 바뀐 게 아니라 청년들의 자립을 돕기 위한 제도와 정책도 함께 마련됐다. 가장 빠르게 가장 성공적으로 전환된 용어가 아닐까 싶다.

이름이 바뀌면 사람들의 시선과 태도가 달라진다. 차별과 편견, 혐오가 줄어드는 효과도 있다. 노숙인을 ‘홈리스’로 불러야 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노숙인은 거리에서 자는 사람을 가리키는 ‘낙인어’다. 홈리스는 집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중립적인 표현이다. 언제든 누구든 다양한 이유로 홈리스가 되기도 하고 홈리스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정책의 방향도 달라진다. 노숙인 정책이 ‘사람’을 관리하고 보호한다면 홈리스 정책은 ‘삶’을 회복하도록 돕는다.

이름은 인식·태도·정책의 차원을 넘어 사회의 패러다임이나 담론을 바꾸는 역할도 한다. 어떤 단어를 쓰느냐가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결정하고 구성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에이지즘(Ageism, 연령차별주의)을 해결할 방법도 이름에서 찾을 수 있다.

초고령사회를 ‘장수사회’로 바꿔 부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초고령사회는 고령자가 지나치게 많은 사회를 말한다. 위기·부담·부양·쇠퇴 등 부정적 이미지가 필연적으로 따라붙는다. 반면 장수사회는 인류의 생애 주기 전체가 길어지는 사회, 오래 살게 되는 사회를 뜻한다. 영어로는 론제비티(Longevity). 나이듦이 새롭게 정의되면 에이지즘은 약화된다.

아무리 좋은 이름이라도 갑자기 바꿔 부르긴 어렵다. 노숙인을 ‘홈리스’로, 초고령사회를 ‘장수사회’라고 부르려면 의도와 결심이 필요하다. 원하는 세상을 얻으려면 그만한 에너지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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