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해요!"→"재미있네!"⋯화정마을 그림 교실에서 생긴 일

2025-02-21

이일순·김삼열 그림교실 '재능기부'⋯어르신들 얼굴 웃음꽃

'집' 주제로 알록달록 색칠, 두 세 시간 앉아 작품 하나 '뚝딱'

"선상님, 다른 그림 안 보면 못 허요! 머리가 안 돌아간다니께. 허연 종이에 뭐슬 그리라고."

"어머니, 저 한 번 따라해 보시게요. 네모 먼저 그려 볼까요? 저는 지붕을 이렇게 그릴 거예요."

지난 19일 화정마을 '청년 이장' 아지트에서 특별한 그림 수업이 열렸습니다. 전주에서 이일순(서학동사진미술관 대표)·김삼열 선생님이 온다는 소식에 할머니들은 일찍이 채비를 마치고 모였습니다. 앉을 자리 없어 따닥따닥 붙어 앉았지만 얼굴은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었네요.

그렇게 앉은 책상 위에는 달랑 하얀 캔버스와 4B 연필뿐. 그림 주제는 '집'입니다. 내가 살았던 집, 살고 있는 집, 살고 싶은 집, 다 좋습니다. 그림을 그려 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할머니들 눈에는 물음표가 가득합니다.

최은주(80) 할머니는 "선상님, 이거 본뜨는 거 아닌가? 나 이러믄 못 허는디. 갑자기 '집'이라고 하니께 생각 나는 게 없네, 우짠대"라며 당황해 했습니다. 다른 할머니들도 "이렇게 하믄 어떻게 혀", "금방 나왔는디 우리 집이 우째 생겼는지 기억도 안 나" 서로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일순 선생님도 덩달아 당황했습니다. '청년 이장' 취재진으로부터 할머니들이 지난해 그림 수업을 받았다고 들었지만 다들 밑그림을 원하셨기 때문이죠. 알고 보니 이전에는 본뜨듯이 아래에 그림을 대고 스케치를 했다는 것입니다. 할머니들의 힘으로 했던 건 물감 칠하기뿐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일단 캔버스를 들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네모부터 천천히 그려 보자는 선생님 말에 할머니들도 하나둘 손에 연필을 들고 따라 그려 봅니다. 닭부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고양이도 하나씩 넣어 캔버스를 가득 채웠습니다.

이전에 '그림' 수업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안 하겠다고 하셨던 강정애(79) 할머니까지 푹 빠졌습니다.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보이면서 집도 그리고 마당에 있는 양은솥, 닭도 그려 봅니다. 괜히 쑥스러운지 더 크게 소리 내 웃으시면서 꼼꼼히 색칠해 봅니다.

하얀 캔버스가 순식간에 알록달록 색깔 옷을 입었네요. 처음에 어떻게 그릴지 몰라 헤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작업에 열중해 봅니다. 생각보다 수준급의 완성도를 보이는 할머니들에 작가님들도 깜짝 놀랍니다. 모두 캔버스를 들고 여기저기 돌려 봅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했나 같이 작품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앉아 있었던 것도 벌써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래도 모두 지친 내색 없이 작품 하나를 완성했습니다. 작가처럼 완벽한 그림은 아니지만 어르신들만의 개성이 담긴 작품은 장관을 이룹니다. 오늘도 '청년 이장' 아지트에서의 수업은 성공입니다. 두 세 시간 내내 실컷 웃고 함께 이야기 나누며 또 하나의 추억을 쌓았습니다.

디지털뉴스부=박현우 기자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