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따라잡기] 송예슬 작가 작품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미술관 5월까지

2025-01-15

소리·냄새·파장 등 이용 ‘보이지 않는 미술’ 추구

해례본 원본과 한 공간에 전시

3개 공간에 낭독·합창·에필로그

세종 민본주의 예술적 재해석

“보이지 않을 때 해석 여지도 넓어

미술은 생각할 여지를 주는 질문”

현재 뉴욕대 티쉬예대 교수 재직

시공을 초월하는 것은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서사다. 하지만 미디어 아티스트인 송예슬(Yeseul Song)작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술작품을 통해 현실에서 시공을 가볍게 넘나들기 때문이다. 대구간송미술관 개관전에 소개되고 현재 진행 중인 상설전에도 전시 중인 작품 ‘훈민정음 해례본: 소리로 지은 집(이하 소리로 지은 집)’에서 무려 6세기에 달하는 시간의 간극을 단숨에 메워놓았다.

개관전엔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1446년에 편찬한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이하 해례본)과 해례본을 현대의 시점에서 재해석한 송예슬 작가의 작품을 한 공간에서 전시했다. 상설전에선 해례본 원본 대신 영인본으로 대체됐다.

작품 ‘소리로 지은 집’은 세 개의 공간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공간에 들어서면 김주원 서울대 언어학과 명예교수와 김차균 충남대 언어학과 명예교수가 한글이 창제됐던 15세기의 발음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낭독한 목소리가 양쪽 벽면에서 들려온다. 두 번째 공간에는 둥근 벽 속 각기 다른 위치에서 대구시민 16인이 훈민정음 해례본을 낭독한 목소리가 합창처럼 들려오고, 마침내 낭독 목소리에 둘러싸인 훈민정음 해례본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 번째 공간에서 펼쳐지는 ‘훈민정음 합창단: 그 이야기’는 에필로그(Epiloue)에 해당된다. 낭독한 시민들의 한글에 얽힌 이야기가 한글 타이포그래피 영상으로 펼쳐져,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연상한다. 디자인 스튜디오 마바사, 전시 기획을 담당한 박성환 학예사와 함께 작업했다. 해례본이 백성들이 말을 글로 쉽게 표현할 수 있게 만든 훈민정음 창제의 배경과 원리를 담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저서라면 대구 시민들의 해례본 낭독은 한글이 대중에 뿌리내린 21세기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지난해 9월 3일부터 12월 1일까지 3개월간 진행한 대구간송미술관 개관전에 소개된 간송미술관 소장 국보와 보물 40건 97점 가운데 ‘해례본’ 전시관에 이어진 긴 대기 줄은 훈민정음의 위상을 대변했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민본정신의 정수인 해례본과 해례본을 현대적 예술 기법으로 재해석한 송예슬의 작품을 한 공간에 전시하며, 훈민정음의 정신과 가치를 과거와 현재의 각기 다른 시점으로 각각 구현해 높은 관심을 받았다.

수많은 발명품들 중에서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발명품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인류에 영향을 미쳤다. 농업, 인쇄술, 전기, 인터넷 등의 발명품들은 각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대표적인 발명품들이다. 그 중에 한글도 한 자리를 차지한다. 인류가 발명한 문자 중에서도 가장 과학적인 문자로 한글이 꼽히기 때문이다. 자음과 모음의 수가 적고 규칙적이어서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고, 자음과 모음의 결합으로 음절을 구성하는 특성으로 다양한 발음을 손쉽게 조합할 수 있다는 것은 한글에 부여된 탁월성이다. 특히 키보드 입력이 용이하다는 점은 디지털 환경에 최적화된 문자로 여겨진다.

한글의 가치는 해례본의 가치 상승으로 이어졌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에 의해 편찬된 해례본에는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과 원리, 자음과 모음의 형성 방식 등에 대한 설명이 기록돼 있다. 1940년 경북 안동의 고가에서 발견된 것을 간송 전형필이 구입했다. 해례본은 가치를 따질 수 없다고 해 ‘무가지보’(無價之寶)로 불리는 간송미술관 최고의 소장품이다.

해례본이 대구간송미술관에 전시되자 해례본 관람을 위한 인파가 줄을 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례본이 발견 된 이후 6·25전쟁 시기를 제외하곤 서울을 벗어난 적이 없었던 터라 관심이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간송 소장 이후 84년만의 지방 나들이였다. 서울에서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한글박물관에서 단기간의 전시 외에는 간송미술관을 벗어난 적이 없는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귀한 전시였는지 가늠이 되고도 남는다.

송예슬은 ‘해례본’ 재해석에 대한 작품 의뢰를 받고 고뇌에 빠졌다. 해례본에 내재된 엄청난 무게감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그는 본질에 집중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해례본의 가치에 주목하는 쪽으로 가자는 입장으로 정리했습니다.” 해례본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의 민본주의(民本主義)였다. 작업은 백성이 사용하던 말과 중국 글자인 한자가 일치하지 않아 글자화하기 어려운 것을 딱하게 여겨 백성이 쉽게 자신의 뜻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자 창제를 표방한 세종의 민본정신을 현대적이고 예술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훈민정음의 정신을 공간에 녹여내는, ‘훈민정음의 향기’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훈민정음이 발음기관의 모습을 형상화 했다는데 입각해, ‘소리’로 공간을 짓고 채우기로 했다.해례본 낭독 목소리를 채집하고, 그것을 기승전결이 존재하는 ‘소리 극’의 형식을 빌려 예술적인 감수성으로 펼쳐놓겠다는 방향성을 설정했다. 훈민정음 창제 때 편찬한 해례본을 낭독하는 것이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 가졌던 의도가 실현된 상태라고 생각했다. 말과 글(한자)이 서로 달라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이 자신의 뜻을 글로 표현하지 못했던 조선시대와 달리 한글을 통해 말과 글의 일치를 이룬 현재의 상태를 시민들의 낭독으로 표현하는 모습은 해례본 속 세종의 의도와 정확히 일치했다.

흔히 그림이나 조각은 작가의 추상적인 아이디어나 감정을 물리적인 재료를 통해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형상이나 이미지로 구현한 것을 의미한다. 캔버스, 유화 물감, 조각을 위한 돌이나 금속, 혹은 디지털 매체 등의 다양한 물리적 소재들을 결합해 나타나는 시각적, 감각적인 형태나 이미지를 의미한다. 하지만 송예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이런 일반론을 비튼다. 시각예술 분야인 미술 작품에서 시각적인 요소인 물질과 형상을 배제하고 소리, 냄새, 파장 등의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요소들의 결합으로 작품을 완성한다. 이른바 보이지 않는 미술의 추구다.

그가 “시각적으로 제시된 작품에는 다양성과 개별적 해석의 가능성이 개입할 여지가 줄어든다”며 “개체의 역량이나 개체의 가치가 공동체의 이해관계에 종속되는 현상과 다르지 않다”고 진단했다. “저는 시각적 매체에의 의존을 벗어나 여러 감각을 통합하는 인식 방식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작업해 왔습니다. 눈앞에 보이지 않을 때, 생소한 감각의 언어를 만날 때, 해석의 여지는 보다 넓어지죠.”

소리나 냄새, 공기 등을 활용한 ‘보이지 않는 조각’을 착안한 배경은 그의 평범하지 않는 이력과 연동된다. 그는 대학에서 문헌정보학을 전공하고, 네이버에서 일했다. 이후 미국 뉴욕대(NYU)에서 미디어아트를 공부한 후 현재 뉴욕대 티쉬예술대학(NYU Tisch ITP/IMA)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문헌정보학 연구와 네이버에서 담당한 일이 사람들의 정보 행태 패턴을 연구하고 설계하는 일이었습니다. 기술이 매개가 되지만 핵심은 사람이었죠.”

좌대 위의 ‘보이지 않는 조각’은 그의 대표작이다. 소리나 에너지 파장, 냄새 등의 비물질적인 상태를 좌대 위에 구현한다. 관람자는 시각이 아닌 청각이나 후각, 촉각 등을 활용해 조각의 형태와 밀도를 감상해야 한다. “시각적인 작품을 감상할 때 사람들은 다 안다고 착각하는데, 저는 ‘보이지 않지만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일까’하는 질문으로 ‘보이지 않는 조각’을 시작했습니다. 비일상적인, 여태 경험해 보지 않은 방식으로 물체와 세상, 그리고 예술을 인지하는 방식을 만들고 나누려는 의도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조각’은 감상자에겐 중의적인 감정을 유발한다. 바로 난감함과 호기심이다. 처음에는 좌대 위에 작품이 보이지 않아 난감해한다. 하지만 이내 호기심이 발동하고 작가가 펼쳐놓은 비가시적인 요소들을 찾는데 집중한다. 시각적이고 직설적인 감상 방식보다 훨씬 내밀하고 능동적인 감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송예슬의 작품은 관람객의 감상을 확인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작품 시리즈의 일부로서, 관람객이 자신이 감상한 조각의 형태를 물질(한 줌의 점토)을 이용해 만드는 프로그램을 전시기간 동안 운영한다. 관람객이 만든 보이는 수천개의 ‘참여의 조각’들은 그의 ‘보이지 않는 조각’과 함께 나란히 전시된다. 이른바 미술의 쌍방향 소통이다. 그가 “누구에게나 미술과 창작의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일깨우고 영감을 불어넣기 위한 작업”이라고 했다.

“작가뿐만 아니라 누구나 그런 예술적인 잠재성이 있고, 상황에 따라 그것이 발현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작품의 역할이 각자의 예술적 잠재력을 발현하고 자신을 발견하는 매개체라고 생각해요.”

물질을 배제하는 작업 특성상 그가 작품을 구현하는 장치는 주로 기술이 담당한다. 기술을 활용하는 사례는 많지만 대개는 시각을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그는 시각적인 요소들은 오히려 제거하는 스타일이다. 이때 작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기술을 더 혁신적이고 섬세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비가시적인 공기나 열기, 소리 등의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요소들을 예술적으로 구현해야 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감각의 언어를 제시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과학과의 협력을 통해 창작의 도구 자체를 직접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서 기술은 도드라지지 않는다. 그는 주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서술하는 언어로서 기술을 바라본다. 이유는 단순하다. “형식이나 매체보다 내용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미술이라는 것이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미술의 역할인 것이죠.” 송예슬의 ‘훈민정음 해례본: 소리로 지은 집(이하 소리로 지은 집)’ 전시는 5월 25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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