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카피해도 신뢰는…" ‘팀타이완’ 만든 엔비디아-TSMC 30년 [정혜진의 라스트컴퍼니]

2025-05-25

“기술은 따라잡을 수 있어도 조직은 복제할 수 없다.”

회사를 키웠지만 문화를 남기지 못해 아쉬워하는 창업자가 많습니다. 문화가 없는 조직은 구성원의 입장에서도 큰 아쉬움입니다.

진짜 조직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분들을 위해 ‘오래가는 기업은 어떻게 다른가’를 다각적으로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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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타이완(Team Taiwan)은 세계 컴퓨팅 산업의 중심입니다. 여기에 엔비디아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들이 있습니다.”

지난 19일 대만 타이베이 뮤직센터,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트레이드 마크인 검정 가죽 재킷 차림으로 무대에 올랐다. 지난해 같은 자리에서 젠슨 황의 서프라이즈를 받은 이들은 기대감에 관심을 집중했다. 젠슨 황은 지난해 이 자리에서 “새로운 아키텍처 플랫폼을 출시하는 주기를 2년에서 1년으로 단축하겠다”고 선언하며 블랙웰의 다음 세대 플랫폼인 ‘루빈’ 시리즈를 예고했다. 5000여명의 참가자들의 관심은 젠슨 황이 또 다른 ‘서프라이즈’를 안겨줄 수 있느냐로 향했다.

이 날 젠슨 황이 호명한 것은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 선언이 아니었다. 대신에 퀀타, 폭스콘, 페가트론, 아수스, MSI……. 하나씩 힘주어 대만의 정보기술(IT) 기업들을 소환했다. “이제 기술의 미래는 이곳 타이완에서 시작된다”는 말과 함께였다. 지난 해만 해도 젠슨 황 CEO를 비롯해 AMD의 리사 수, 퀄컴의 크리스티아누 아몬, 인텔의 팻 겔싱어, ARM의 수장 르네 하스 등 반도체 업계에서는 고유명사로 통하는 이들이 모였지만 올해는 달랐다. 이들이 사라진 자리에 강력한 존재감을 보인 건 ‘팀 타이완’이라는 이름의 ‘밸류 네트워크’였다.

‘팀 타이완’ 원 팀의 부상

“AI는 전기나 인터넷과 같은 인프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인프라를 구축하는 건 결국 사람입니다. 그 모든 시작이 바로 타이완입니다.”

세계적인 경영학자 마이클 포터는 일찍이 ‘밸류 체인(Value Chain)’ 개념을 통해 기업의 내부 프로세스를 분석했지만, 현대의 경영 환경은 포터가 말한 선형적이고 폐쇄적인 밸류 체인을 넘어 ‘밸류 네트워크(Value Network)’의 개념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제 기업의 경쟁력은 누구와 손잡고, 어떻게 협력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점에서 ‘팀 타이완’ 시대의 부상은 강렬한 시사점을 던진다.

실제로 이날 기조연설보다 앞서 젠슨 황의 첫 공식 일정은 타이베이의 고급 레스토랑 ‘전유(Chuanyi)’에서 이뤄졌다. 대만 전통 스타일의 딤섬과 해물 요리 등의 메뉴가 있고 가격은 1인당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이 프라이빗 레스토랑에 모여든 이들의 면면은 더욱 화려했다. 웨이 저자 TSMC 회장을 비롯해 차이 리싱 미디어텍 CEO, 배리 람 콴타 CEO 등 대만을 넘어 전세계의 반도체 업계를 주무르는 이들이었다. 이들 기업의 시가 총액만 1조 달러 이상으로 꼽혀 대만의 중앙통신사는 전유 회동을 ‘1조 달러 연회(1Trillion dollar banquet)’로 이름 붙였다. 젠슨 황이 대만의 공급 업체들에게 감사함과 각별함을 표하는 자리로 마련된 이 자리는 ‘팀 타이완’의 회식 자리이자 컴퓨텍스 2025의 예고편이었다.

연례 행사처럼 타이베이의 야시장 거리를 도는 대신 젠슨 황은 웨이 저자 TSMC 회장과 식당 밖으로 나와 인터뷰에 응했다. 웨이 저자 회장이 먼저 운을 띄웠다. “20년 이상 젠슨과 파트너로서 활동하며 칩을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영광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을 대신해 젠슨이 대만에 이 비즈니스를 들여온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합니다.” 곧 이어 젠슨 황의 답사가 뒤따랐다. “TSMC 없이는 지금의 엔비디아도 없었을 겁니다.”

짧은 틈에도 젠슨 황은 컴퓨텍스의 위상 재평가도 놓치지 않았다. “PC 혁명으로 (오늘날의) 컴퓨텍스가 가능했고 전 세계가 타이완으로 오고 있습니다.”

젠슨 황, 웨이 저자의 30년 동반자 관계

젠슨 황과 웨이 저자의 파트너십은 벌써 3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둘의 관계가 특별한 이유는 단지 긴 세월 때문이 아니다. 이들이 만들어낸 ‘밸류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협력의 패러다임 때문이다. 피터 드러커는 "미래의 경쟁력은 내부의 역량보다 누구와 동맹을 맺고 어떻게 관계를 관리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강조했다. 엔비디아와 TSMC는 이 철학을 철저히 실천해왔다.

젠슨 황은 1963년생, 웨이 저자는 1931년생으로 아버지와 아들 세대에 가깝다. 당시 한 차례의 폐업 위기를 갓 넘긴 스타트업인 엔비디아에게는 미래 가능성 하나만 있었고 TSMC는 당시 이미 시가 총액이 8억 달러(약 1조1000억원)에 달하는 큰 기업이었다. 그럼에도 웨이 저자는 젠슨 황의 이메일을 받고 엔비디아 사무실을 직접 방문했고 작은 기업이라도 헌신한다는 원칙을 실행해 젠슨 황을 파트너로 존중했다. 2007년 미국 인텔의 컴퓨터 역사 박물관에서 있었던 두 사람의 대담은 그 신뢰 관계의 초기 모습을 잘 보여준다. 당시 40대의 앳된 얼굴을 한 젠슨 황은 웨이 저자에 대한 존경심으로 인터뷰어를 자처했다. 이 자리에서 웨이 저자는 TSMC의 문화를 두고 “고객의 성장 속도에 맞춰 유연하게 생산 능력을 조정하고 엔비디아처럼 빠르게 성장하는 고객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며 ‘고객이 필요하면 무슨 일이든 한다((Jump through hoops for you)’는 철학을 강조했다.

원칙 1 어렵고 급해도 둘 사이에 중재자를 두지 않을 것

이 철학을 2년이 채 안 가 실제로 실행해야 할 사건이 생겼다. 2009년 40나노미터 공정에서 일어난 수율 저하 문제였다. 엔비디아, AMD, 퀄컴을 비롯해 주요 고객사들이 차기 제품 생산 일정에 막대한 차질이 생겨 금전적인 손실을 입고 있었다. 급한 불을 끄기 위해 경영 일선으로 복귀한 웨이 저자는 젠슨 황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정확히 한 달의 시간을 요청했고, 한 달 후 젠슨 황의 집에서 약속한 시각 정각에 만난 두 사람은 피자를 먹었다. (이후의 상황은 웨이 저자가 지난해 출간한 자서전에서 묘사한 내용을 옮겨왔다.) 일 이야기는 없이 평소처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웨이 저자는 젠슨 황의 서재로 자리를 옮긴 뒤 웃음기를 빼고 제안했다. “(엔비디아가 입은 피해를 두고) 1억 달러의 보상안을 제시합니다. 중재인 없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습니다. 단 48시간 내에 확답을 해줘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젠슨 황은 48시간이 지나기 전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떤 일에도 중재인을 거치지 않기 위해 한 달 간 고민해서 최선의 안을 도출한 결과였다. 당시 엔비디아는 주가가 전년 대비 80% 이상 떨어졌고 막대한 자금난을 겪고 있는 상황에 차기 제품까지 생산 차질이 빚어진 상태였다.

이후 엔비디아와 TSMC의 신뢰 관계는 더욱 공고해졌고 이후 28나노 공정을 채택한 케플러 아키텍처 기반의 지포스 GTX 680 시리즈(2012년 출시)로 또 한 번 도약의 기회를 맞고 기술 리더십을 가져갈 수 있게 됐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기술 이슈가 아니라, 신뢰와 해결 의지로 동맹을 강화한 결정적 계기였다. 이 기간 공급망을 글로벌 파운드리와 TSMC로 나눠 가는 전략을 취했던 AMD는 TSMC와의 협상력을 잃었고 공급망도 유연하게 가져가지 못해 점유율 격차가 더욱 벌어지게 되면서 운명이 엇갈렸다.

원칙 2 명확하게 소통하고 인정한다

지난해 하반기에도 블랙웰 시리즈의 출하가 늦어지면서 업계에서는 두 회사의 관계가 악화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젠슨 황은 문제를 해결한 뒤 이 역시 명확하게 정리했다. “이번 디자인 결함은 100% 엔비디아의 설계상 잘못으로 비롯됐습니다. TSMC의 도움 덕분에 문제를 신속히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피하지도 떠넘기지도 않는 젠슨 황다운 명쾌한 정리로 둘 간의 신뢰 관계는 더욱 굳어졌다.

AI와 로봇 시대의 ‘약속된 생태계’

이들 두 사람에서 시작된 관계는 이제 더 넓은 생태계로 확장되고 있다. 미디어텍은 엣지 AI 칩을, 폭스콘은 시스템 구축과 AI 인프라를, 콴타는 AI 서버 조립을 맡아 각자의 전문성을 발휘한다. 지난 2월 엔비디아와 폭스콘이 대만 남부에 AI 팩토리를 건설한다고 발표했을 때도 ‘팀 타이완’ 생태계의 협력이 있었다. 젠슨 황은 이제 AI를 넘어 로봇 혁명의 중심으로 대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로봇이 다음 산업 혁명을 이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은 바로 이곳 대만입니다”라고 선언했다. 기술 혁신의 핵심은 결국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를 시작으로 공통의 비전을 나누는 생태계에 있다는 게 시사점이다.

엔비디아와 TSMC의 30년 동맹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인가. 결국 경쟁력의 본질은 사람이다. 기술을 넘어 서로가 가진 최고의 역량을 신뢰하고 협력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경쟁력이다. 엔비디아와 TSMC가 30년간 보여준 동맹은 단순히 성공 사례가 아니라, 전통적 밸류 체인을 뛰어넘는 새로운 협력의 시대를 여는 강력한 상징이다. ‘팀 타이완’을 멀리서 부러워하기에는 상황이 너무 절박하다. 더욱 늦기전에 신뢰와 가치로 뭉친 진짜 원 팀을 만들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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