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수필] 겨울에도 꽃은 핀다-김수현

2025-01-01

“언니, 자?”

잠결에 동생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날따라 초저녁부터 일찍 잠이 든 터였다. 평소 방문이 닫혀 있으면 동생은 걷는 것도 조심하곤 했다. 눈도 뜨지 않은 채, 손을 뻗어 머리맡에 둔 안경을 찾을 때였다. 방문이 요란스럽게 열렸다.

“자는 거, 깨워서 미안해.”

미안하다면서도 동생은 자기 휴대전화를 불쑥 들이밀었다. 어느 유튜버가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텍스트로 와글와글 떠들었다. 안경을 쓰자 그제야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국회의사당이 휴대전화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가끔 서울에 올라갔을 때 지하철 안에서나 보았던 곳이다. 국회의사당 앞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계엄령이 선포되었대.”

그 말에 준비 없이 찬물에 몸을 담근 듯, 숨이 가빠졌다. 계엄령이라는 단어는 아주 낯설지는 않았다. 학창 시절 내내 역사책에서 계엄령에 대해서 배웠다. 전라도에 둥지를 틀게 되면서는 광주민주화운동과 여순사건에 대해 조금 더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나의 삶과 가까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계엄령과 가까운 것은 미얀마였다. 미얀마에서 온 유학생들은 ‘계엄령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죽고 있다’고 말했다. 미얀마 유학생들은 자기 나라에 있었을 때, 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다고 했다. 군대가 오면 골목으로 흩어져 숨을 죽였다고 한다. 미얀마 상황을 동영상으로 볼 때면, 미얀마 유학생들은 울곤 했다. 젊은이들은 남녀 구분 없이 군대로 가도록 법이 바뀌었으며, 미얀마로 돌아가면 출국이 어려워질 수도 있다고 했다. 말로만 들었던 미얀마의 현실이, 한국에도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문득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처형될 사람들의 사진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같은 이불로 몸을 둘러싸고, 동생과 나는 작은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겨울바람이 창문을 뚫고 집을 배회하는 것만 같았다. 국회의원들은 담을 넘었고, 닫힌 국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기자들과 시민들도 따라 들어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헬기가 날아다니고, 군대는 국회의사당의 창문을 깨고 들어갔다. 일련의 과정들이 각종 매체를 통해서 전달되는 동안, 휴대전화는 잠시도 쉬지 않고 울렸다. 사람들은 메신저의 속도가 느려지고 포털 사이트에 접속이 되지 않는 것을 두고 걱정했다. 외국계 메신저를 다시 사용해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예술을 하거나 언론을 배우는 친구들은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소식은 외국까지도 금방 퍼져, 외국의 친구들이 한국에서 얼른 몸을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연락이 왔다. 커뮤니티에는 도로에 탱크가 다닌다는데, 진짜냐고 묻는 글들이 올라왔고, 가상화폐 거래소는 접속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원화의 가치는 떨어졌고, 비행기표를 구매했던 사람들은 출국 금지 명령이 내려오지 않을지 걱정하였다. 나와 동생은 생필품을 구비할지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으며, 과거 계엄령에 대해서 다시 찾아보곤 했다.

문득 얼마 전, 일터에서 앞 시간대 사람과 교대하며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날 아침, 그는 평소와는 달리 상기된 표정이었다. 매장에 방문했던 손님과 이야기를 하다 의견 충돌이 생긴 모양이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우리가 과하다고 할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우리에게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없었잖아.”

그가 어릴 때,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의 사촌들은 광주에 살고 있었고, 혼란한 광주에서 근처 지역으로 몸을 피하려고 했다. 그의 고모는 사촌 누나 둘의 손을 잡고 밤에 산을 탔다. 그러나 군인들에게 발각이 되었고 고모와 큰 사촌 누나는 그 자리에서 사살되었다. 작은 사촌 누나는 중학생이었지만, 또래에 비해 작았다 한다. 군인은 그의 작은 사촌 누나에게 너는 어려서 살려 준다고 했다. 그의 작은 사촌 누나는 머리에 피를 흘리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울면서 며칠을 걸어 그가 있는 지역에 도착했다고 한다. 광주에 있던 그의 친척 중, 살아남은 사람은 그의 작은 사촌 누나 단 한 사람이었다.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아마 그녀는 머리의 묵은 흉을 만지작거렸으리라.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몇십 년 만에 과거의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었다. 이번에는 계엄령이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해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혼란에 빠졌다. 경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표현의 자유마저 걱정해야 할 정도로 민주주의는 퇴보하였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덕담을 나누는 시점에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혼란이 와도 해는 매일 뜬다. 새해는 올 것이고, 1월 1일의 겨울 해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보다 더 빨리 세상을 밝힐 것이다. 겨울 추위에 마냥 웅크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추울수록 뛰어야 몸이 더워지는 법이다. 이불에서 나와 책장에 있는 역사책을 꺼내 든다. 얇게 먼지가 쌓여 있다. 마른 휴지로 가만히 숨죽인 시간을 털어 낸다. 슬프고 화날 때는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기도 한다. 책의 여백에 오늘 날짜를 쓴다. 새해의 시작이 조금 울적하더라도 괜찮다. 서로 손을 잡고 따뜻하게 데운 방바닥에 앉아 옛날이야기, 지금 이야기 가릴 것 없이 도란도란 나누다 보면 지금보다 한결 가볍게 새해를 시작할 테니.

나뭇가지가 창밖에서 참 춥게 흔들린다. 쓸쓸하고 힘든 계절이다. 그래도 몇몇 나무는 꽃을 피운다. 대표적인 것이 동백이다. 제주에는 동백이 한창이라고 한다. 곧 이곳도 동백이 필 것이다. 겨울에도 꽃은 핀다. 그리고 몇 되지 않는 꽃에도 새들이 지저귀며 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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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gigo@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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