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수노조 사업장에서 회사가 노조별 조합원 수에 따라 지원을 달리 하더라도 차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이번 판결은 회사가 복지 차원에서 노조를 지원할 때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기준을 적용하면 문제가 없다는 원칙을 명확히 세웠다. 이에 따라 기업들이 복수의 노조에 동일한 지원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부담이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25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제2부(주심 엄상필 대법관)는 이달 15일 포스코가 복수노조에 대한 차량 임차비용을 조합원 수에 따라 차등 지급한 것이 노동조합법상 공정대표의무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회사 측 패소로 판단한 원심 판결을 파기 환송했다.
사건은 2019년 포스코가 한국노총 소속 포스코 노조와 민주노총 소속 금속노조 포스코지회 등에 노조 활동용 차량 3대를 지원하면서 시작됐다. 포스코는 조합원 수가 많은 포스코 노조에 차량 2대를 우선 배정해 20개월간 사용하도록 했다. 상대적으로 조합원이 적은 포스코지회에는 차량 1대를 5개월간만 제공했다. 남은 지원 기간에도 포스코 노조가 차량을 사용하면서 결과적으로 포스코 노조는 총 55개월 동안 차량을 이용한 반면 포스코지회는 5개월만 이용하게 됐다.
포스코지회는 회사가 차량을 배분할 때 체크오프(조합비 일괄 공제) 방식의 조합원 수를 기준으로 지원 규모를 차등한 것이 노동조합법 제29조의4 제1항이 정한 공정대표의무 위반이라며 포스코를 상대로 경북지방노동위원회에 시정신청을 냈다. 공정대표의무란 복수노조 사업장에서 교섭대표 노조와 회사가 교섭 창구 단일화 절차에 참여한 다른 노조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노동조합법상 의무다. 경북지노위가 포스코지회의 주장을 받아들여 구제 결정을 내리자 포스코 측은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회사가 조합비 일괄공제(체크오프) 명단을 기준으로 차량을 배분한 방식을 합리적이라고 판단해 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반면 2심은 회사가 각 노조의 실제 조합원 수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며 소수 노조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법원은 포스코 측을 대리한 법무법인 태평양(BKL)의 적극적인 변론에 다시 판결을 뒤집었다.
태평양이 변론 과정에서 강조한 점은 회사가 이미 확보한 체크오프 방식의 조합원 명단을 활용한 게 가장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점이다. 특히 차량 지원은 노동조합 활동에 있어 필수가 아닌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해 회사가 명확하고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배분했다면 추가적인 책임을 부담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포스코 측을 대리한 김상민 태평양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공정대표의무의 범위를 명확히 정리한 중요한 판례”라며 “사무실 제공 등 필수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회사의 적극적인 의무가 인정될 수 있지만 차량 지원과 같은 부수적 혜택은 소극적이고 중립적인 기준을 지키면 충분하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동안 많은 기업들이 복수노조 문제로 법적 불확실성을 겪었으나 이번 판결로 보다 명확한 기준이 마련됐다”면서 “기업들의 법적 부담이 줄어들고 노사관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판결은 지난해 대법원이 포스코의 근로시간 면제(타임오프) 한도 배분 과정에서 소수노조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고 판결한 것과도 맥을 같이한다. 당시에도 태평양이 포스코 측을 대리해 기업이 복수노조 문제에 있어 ‘소극적이고 중립적인 공정대표의무’만 부담하면 충분하다는 원칙을 끌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