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상 유례없는 기술 진화 시대다.
인류는 지금 생성형 인공지능(AI), 자율지능, 고성능 컴퓨팅(HPC), 양자기술 등 새로운 기술의 파도 속에 있다. 그리고 그 거대한 파도를 밀어 올리는 동력은 다름 아닌 에너지, 그 중에서도 전력이다. 전력은 변화를 현실로 만드는 토대이자 디지털 혁신의 연료이며 기술 사회의 생명선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5년 세계 에너지 투자가 사상 최대치인 3조3000억달러(약 4500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전력망, 에너지효율화 설비, 에너지저장장치(ESS), 전기화 설비까지 포함된 수치로, 한국 GDP의 두배에 육박하는 규모다.
지정학적 긴장과 경기 불확실성 속에서도 에너지 전반에 대한 투자가 이처럼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은, 기술사회가 '전력'을 포함한 에너지 인프라 없이는 결코 작동할 수 없다는 현실을 다시 한번 분명히 보여준다.
◇ AI 시대, 전력이 멈추면 모든 것이 멈춘다
전력 확보는 단순한 생산의 문제가 아니다.
전력 산업의 밸류 체인은 에너지를 생산하고 손실 없이 수송하며, 수요처에 안전하게 공급하는 전 과정, 즉 생산-송전-배전-공급으로 이어지는 인프라 체계 전체를 포함한다. 이 체계는 물리적 기반시설이자, 기술·정책적 조정이 필요한 복합 구조다. 전력 인프라는 설비 수명과 교체 주기를 가진 물리 자산이기에,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면 중장기적 투자와 정책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한국 현실은 이 흐름과 괴리를 보이고 있다. 주요 송전선 사업은 수년째 지연되고 있다. 급증하는 전력 수요에 대응하지 못해 데이터센터, 스마트팩토리, 전기차 배터리 생산기지, 대규모 복합문화시설 등 고전력 기반 산업시설 유치가 지연되거나 무산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또한 산업 입지의 지역 분산이 가속화되고 있음에도, 전력 인프라는 여전히 수도권 중심의 병목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후화된 송배전망, 지역 간 공급 격차, 인허가 지연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전력 인프라는 이제 디지털 산업 전략의 실행력을 약화시키는 리스크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전력 확보의 우선순위는 단순한 기술 실현이나 산업 성장이어서는 안된다. 전력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이며, 사람 중심의 전력 공급으로 전환해야 한다. 즉, AI와 같은 기술 실현을 위한 수단이 아닌, 사람과 사람, 지역, 세대를 연결하는 공공재 차원에서 다뤄져야 한다.
해외 주요국은 이미 이러한 방향으로 전환을 시작했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후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신뢰할 수 있는 에너지원 확보에 초점을 맞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 에너지부는 신규 송배전망 건설에 15억달러(약 2조23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전력망 복원력 프로그램', '송전망 원활화 프로그램' 등을 통해 민관 협력 투자 정책을 가동하고 있다.
유럽연합(EU)도 전력망 현대화 및 효율성 향상 사업에 290억유로를 투자하고 있으며, 해상 송전망과 사회적 갈등 완화 장치를 함께 설계해 에너지 형평성과 효율을 동시에 높이고 있다. 전력 그리드 강화는 디지털 수요 대응과 기후정책의 핵심 수단으로 인식되며, 공공과 민간의 동시 투자가 이미 본격화된 상황이다.
◇ 기술혁명의 뿌리, 전력 인프라를 재설계하라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국가 차원의 적극적인 선제적 투자와 구조적 전략 없이, 디지털 전환의 중심에 설 수 없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다행히 새로 출범한 정부가 '에너지 고속도로' 정책을 본격 추진하면서 변화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정부는 전력 인프라를 단순한 공공재가 아닌 디지털 경제의 기반 인프라로 인식해야 한다. 단기 예산 집행이나 개별 대응을 넘어, 중장기 투자 로드맵과 구조적 실행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송배전망 병목 해소와 지역 간 균형을 위한 종합적 계획이 시급하다.
민간 기업 역시 책임 있는 파트너로 나서야 한다. 기간통신사업자인 세종텔레콤은 지난해 유선통신사업을 물적 분할해 세종네트웍스를 출범시키고, 올해는 전기·통신·소방·토목공사 전문기업으로 사업구조를 재편했다.
과거 방송, 전화, 인터넷 등 통신망을 전국민에게 보편적 서비스로 제공하는 데 앞장섰던 것처럼, 이제는 전기·통신 공사를 포함한 기술 인프라 구축의 파트너로서 제4의 물결 속 대한민국의 경쟁력 확보에 디딤돌이 되고 있다. 또한 전력 소외 지역의 노후 설비 교체, 전기안전 취약계층 대상 무상 점검 등을 통해 사람 중심의 전력 인프라 형평성에 기여하고 있다.
통신과 전기는 더 이상 독립된 산업이 아니다. 두 축은 AI 빅뱅과 직결되며, 기술 사회의 실체를 구성하는 핵심 연결망이다. 단절된 인프라가 아닌 통합된 사회 기반망으로 접근할 때, 진정한 기술사회 지속가능성이 확보된다. 세종그룹은 앞으로도 기술 진보가 소외 없이 작동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고도화된 인프라를 형평성 있게 구축해 나가는 민간 파트너가 되겠다.
기술의 물결은 거스를 수 없다. 그러나 그 물결이 누구를 향해, 어떻게 밀려오는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제는 전력을 더 멀리, 더 넓게 보내야 할 때다.
〈필자〉세종그룹을 설립한 대한민국 기업인이다. 1990년 그룹 모태인 홍승기업을 설립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동아증권(현 NH증권)을 인수해 금융업에 진출한데 이어 2007년에는 EPN, 2011년 온세통신을 인수해 지금의 세종텔레콤으로 합병했다. 전기공사, 블록체인, 5G특화망 등 커넥티드 사업 전개를 통해 세상에 기여하는 혁신 기업으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다.
김형진 세종텔레콤 회장 sejongtelecom@sejongteleco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