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상대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고 아베 신조 총리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닌 것 같다. 트럼프 1기 관세협상에서 신조에게 너무 많이 양보했다며 생색냈던 트럼프, 그가 180도 돌변했다. “30~40년간 미국으로부터 뜯어내면서 잘못 길들었다(spoiled)”며 일본을 사정없이 몰아붙이고 있어서다.
7월 8일 상호 관세 유예 종료 시점을 앞두고 트럼프는 6월 말부터 연일 일본을 때리고 있다. 막대한 무역적자를 거론하면서 미국 자동차와 석유 수입을 늘리라고 주문하더니, 쌀값이 치솟는데 왜 미국 쌀을 수입하지 않느냐고 압박했다. 오는 20일 정권의 명운이 달린 참의원 선거를 앞둔 이시바 정권에 쌀 수입을 하라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안인데도 말이다.
아베 때와는 다른 트럼프 압박에
일, 동병상련 한국에 손 내밀어
함께 풀 뜯는 지혜 발휘해야
트럼프는 수입을 당장 늘리지 않으면 관세를 일방적으로 통보하겠다고 으름장까지 놨다. 통보문엔 “‘친애하는 일본씨, 당신은 자동차에 25% 관세를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와 같은 내용이 담길 것”이라고 했다. 특유의 조롱하는 말투다. 미국이 필요한 것을 안 들어주면 관세로 30%나 35%를 부과하겠다고도 했다. 지난 4월 트럼프가 발표한 상호관세는 24%였다.
협상 책임자인 아카자와 료세이 경제재생상의 행보는 눈물겹다. 지난주 트럼프 취임 후 벌써 일곱 번째 워싱턴을 찾은 그는 협상이 안 풀리자 일정까지 연장하면서 지일파인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에게 SOS를 쳤다. 그런데 베선트 장관이 바빠서인지, 피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만남은 불발됐다. 이번엔 “정력적으로 조정하겠다”던 아카자와 재생상은 결국 빈손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일본식으로 말하면 ‘공기(空氣·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고 있다. 물론 미국에 더 많이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제 미국에 ‘No라고 말해야 할 때’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최근 아사히 신문 보도다. 아사히는 정부 관계자를 인용해 일본이 7월 1일 워싱턴에서 개최하기로 조율 중이던 ‘미·일 외교·국방(2+2) 장관회의’를 보류했다고 전했다. 미국 국방부가 방위비를 국내총생산(GDP) 대비 3.5%까지 늘리라고 압박하자 아예 이 의제가 테이블에 오르지 않게 하기 위해 회의를 미뤘다는 것이다. 물론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즉각 부인했다. 하지만 ‘미·일 2+2회의’를 양국 관계의 상징적 행사라고 중시해온 일본에서 이런 보도가 나온 건 예사롭지 않다. 더욱이 이번 회의는 트럼프 2기 출범 후 첫 회의였다. 한 정부 소식통은 “트럼프 1기나 바이든 행정부 때 미국 당국자를 만나면 ‘한국도 일본 수준으로 하면 안 되나’라는 항의를 수없이 들었다. 그런데 요즘 일본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의 연대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에도 이런 배경이 있다. 지난달 도쿄 한국대사관에서 열린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 기념 리셉션에는 이시바 시게루 총리를 포함해 전직 총리가 무려 3명, 관방장관, 재무상, 외무상, 방위상 등 내각 주요 인사들이 총출동했다. 여기에 자위대 통합막료장(합참의장), 육·해상막료장(육·해군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까지 참석했다. 이시바 총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하고 귀국한 지 24시간도 안 돼 행사장에 깜짝 등장했다. 최고의 성의 표시였다. 한·일 관계가 급격히 호전됐던 윤석열 정부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시바는 축사에서 의미심장한 제안을 했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함께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고 나가자”고. 아직은 미덥지 않지만 한·일 관계 강화 입장을 밝힌 이재명 정부에게 과감하게 손을 내민 것이다. 일본 내에선 미·중 패권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동병상련을 겪고 있는 한국을 향한 이시바의 정치적 승부수라는 평가가 나왔다.
두 번의 정상회담, 일곱 번의 장관 방미. 그러나 성과 없는 지금 일본의 상황은 남의 일이 아니다. 6월 출범한 이재명 정부는 이제 첫 한미 정상회담을 준비하고 있다. 이미 미국발 청구서는 쌓였고, 트럼프 입에서 일본에 한 것 같은 험한 말이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이 와중에 중국은 집요하게 한국과 일본을 향한 ‘미소 공세’를 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첫 한·일 정상회담에서 이시바 총리의 손을 맞잡았다. 도랑에 든 소는 양쪽 둔덕의 풀을 뜯어 먹을 수 있어서 처지가 유복하다는 말이 있다. 한국과 일본은 같은 도랑에 있는 소다. 미국 쪽 풀과 중국 쪽 풀을 모두 뜯어 먹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트럼프 임기는 3년 반 남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임기는 언제 끝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