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벳쇼에서 본 미래 교육
전 세계 600여개 기업 참가 ‘교육계 CES’
칠판 등 대형 장비부터 SW까지 총망라
수업 요약·이미지 생성 등 신기술 눈길
‘AI 어떻게 잘 활용할까’ 새로운 화두로
수십명의 문학 에세이 몇분만에 첨삭
기술 상당수 교사 역할 덜어주려 노력
결국 교사가 학생에 집중할 수 있게해
활용 능력 키우고 접근성 격차 줄여야
“학생들의 시험 데이터가 쌓였네요. 이제 ‘그’에게 맡겨 봅시다.” 지난달 23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엑셀센터 전시장의 한 에듀테크(교육+기술) 업체 부스에선 수업 관리 프로그램 시연이 한창이었다. 업체 직원이 ‘딸깍’ 하고 버튼을 클릭하자 인공지능(AI)은 순식간에 가상의 학생 수십명의 시험지를 채점하고 점수를 정리해 화면에 띄웠다. 학생의 이름을 클릭하면 한 학기 동안 본 시험 결과가 그래픽으로 나타나고, 취약점과 강점도 정리됐다. 업체 직원은 “사람이 몇 시간 동안 할 일도 AI는 몇 초 만에 끝낸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22∼24일 런던에서 열린 세계 최대 에듀테크 박람회 ‘BETT(British Educational Training and Technology) Show(벳쇼)’는 AI가 이미 우리 삶 깊숙이 다가왔고, 교육 분야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현장에서 만난 에듀테크 기업과 전문가들은 “교실에서의 AI 활용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AI는 교육을 혁신할 수 있다”면서도 “혁신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전통적인 교육을 탈피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AI는 교사와 학생의 소통을 돕고 교육의 효과를 높이는 ‘효율적인 도구’란 것이다.
◆에듀테크 업체들 “교육도 AI가 대세”
올해로 개최 40주년을 맞은 벳쇼는 매년 전 세계 에듀테크 기업이 교육 현장에서 쓸 수 있는 혁신 기술을 선보이고, 교육 이슈를 다루는 세미나·토론 등도 열리는 교육계의 주요 행사다. ‘오늘을 배우고, 내일을 이끈다(Learning Today, Leading Tomorrow)’는 슬로건을 내건 올해에는 전 세계 600여개 기업이 부스를 차린 가운데 130여개국에서 3만5000명의 관람객이 전시장을 찾았다.
축구장 5배 크기인 3만1500㎡ 규모의 전시장에 빼곡히 들어선 부스와 수많은 관람객은 ‘교육계의 CES(세계 최대 IT 전시회)’란 수식어를 실감케 했다. 전시장은 칠판 등 대형 장비부터 수업에 사용하는 소프트웨어, 보안 시스템까지 교육 관련 기술이 총망라된 모습이었다.
전 세계에서 온 에듀테크 기업 관계자와 교사, 각국 정부 관계자 등은 부스를 돌면서 AI, 가상현실(VR) 등이 접목된 다양한 제품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교복을 입고 단체로 행사장을 찾은 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구글 등 세계적 규모의 유명 기업 부스는 특히 많은 이로 붐볐다. 메타는 면접 훈련 등을 할 수 있는 VR 기기, 보청기 역할을 해 청각장애 학생의 학습을 돕는 스마트 안경 등을 전시해 체험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섰고, 구글은 부스를 실제 교실처럼 꾸미고 관람객들이 구글의 ‘맞춤형 학습’ 기술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 눈길을 끌었다. 수업 내용 자동 요약 기능 등이 담긴 전자칠판 신모델을 공개한 삼성전자 부스에도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학습’을 넘어 ‘정서, 창의성’에 방점이 찍힌 기술도 많았다. 영국 노섬브리아대학은 어린이들에게 역할놀이 등을 통해 과학·기술·공학·수학 관련 직업에 대한 고정관념을 없애는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이들은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아이들은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직업을 탐색할 수 있다”고 밝혔다.
어도비는 필요한 시각자료를 문장으로 입력하면 금세 이미지를 만드는 AI 기술을 들고 나왔다. 학생이 손쉽게 자신만의 그림책을 만드는 등 문학적 상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전시장의 뜨거운 열기는 ‘교육 현장은 이미 바뀌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듯했다. 전시장에 모인 이들의 화두는 ‘AI를 교육에 받아들일 것인가’가 아닌 ‘AI를 어떻게 잘 활용할까’로 넘어간 모습이었다. 벳쇼 주최 측인 영국교육기자재협회(BESA)는 “우리는 기술을 사용해 교육을 혁신할 수 있다고 믿는다”며 “앞으로 교육 방식은 바뀔 것이고, 우리는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고 밝혔다.
◆“기술은 교사 보조 수단일 뿐”
벳쇼에서 선보인 기술의 상당수는 ‘교사의 역할을 덜어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올해 벳쇼에서 많은 상을 휩쓸어 화제가 된 ‘올렉스AI(Olex.AI)’ 프로그램(영국)도 생성형 AI를 활용해 채점 등 교사의 업무량을 줄이는 것이 핵심이다. 부스에서 살펴본 올렉스AI는 학생이 종이에 쓴 글을 디지털로 변환하고, 수십명이 쓴 문학 에세이를 몇 분 만에 첨삭했다. 올렉스AI 관계자는 “교사가 한 학급당 채점과 피드백에 평균 4시간을 소비하는데, 이 과정을 몇 초로 줄일 수 있다”며 “학생 데이터가 쌓여 데이터 중심 평가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에듀테크 업체들은 이런 기술의 목적은 ‘교사와 학생의 관계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술이 교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학생에게 더 집중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올렉스AI는 “우리의 목표는 교사 작업을 자동화하는 것이 아니고 교육의 질을 높이도록 돕는 것”이라고 했다. ‘업무부담 감소’ 부문에서 상을 받은 ‘티치메이트AI(TeachMateAI)’도 “우리는 교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AI를 통해 교사를 돕는다”고 밝혔다.
영국 정부가 에듀테크에 관심을 쏟는 이유도 비슷하다. 브리짓 필립슨 영국 교육부 장관은 벳쇼 개막식에서 “내가 생각하는 미래는 기술로 교사들의 채점, 서류 작성이 줄고, 교사들이 아이들의 변화를 위해 에너지를 쏟고, 열정을 온전히 집중시키는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초·중·고 교실에 AI 디지털교과서 도입을 앞둔 한국에도 시사점을 주는 대목이다.
전시장을 찾은 한국의 한 교사는 “디지털 기술이 학생과 교사 사이에 들어오면 교사의 역할이 축소된다는 시각도 있지만 오히려 학생과 교사의 거리를 좁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기술을 활용해 남는 시간에 학생과 더 교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장에서 열린 전문가 강연과 토론에서는 교사의 AI 활용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교사가 기술을 습득하고 학생에게 잘 활용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AI 기술이 소수의 전유물이 될 경우 교육 격차가 벌어질 수 있는 만큼, 기술 접근성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AI vs 교육’을 주제로 강연한 더그 델파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 교수는 “교육에 AI를 금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교육 현장은) 변화에 적응하고 학생들에게 책임감 있는 AI 사용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제언했다.
런던=글·사진 김유나 기자 y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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