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식의 세포에서 우주까지
아마 한국인이라면 고려 시대에 개발된 금속 활자가 유럽의 구텐베르크보다 훨씬 더 앞선다는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 보았을 것이다. 고려 시대의 작가 이규보는 자신의 문집 『동국이상국집』에서 『상정고금예문』이라는 책을 금속을 이용해 만든 글자로 찍었다고 언급했다. 이 기록을 금속 활자 이야기로 믿을 수 있다면 이것은 1230년대 무렵에 금속 활자를 사용했다는 뜻이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실용화한 것은 1440년대이므로 고려가 구텐베르크보다 200년가량 시대가 앞선다. 1377년 금속 활자로 실제 인쇄한 『직지심체요절』이라는 책도 남아있다.
금속활자 개발 앞섰지만 활용 못한 고려
구텐베르크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다. 혹시 『상정고금예문』이나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하는 방법을 개발한 기술인의 이름을 아는가. 누구도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할 것이다. 기술인을 중요하지 여기지 않거나 기록에 소홀했던 문화를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많은 영향을 미치며 유럽 문명을 크게 바꾼 데 비해, 고려의 인쇄술은 그만한 충격을 주지 못했다는 점도 짚어 볼 만하다. 인쇄술 발전과 보급에 노력한 사람들 역시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라틴어 교재나 성경처럼 많은 부수를 대량으로 만들어 유럽 곳곳에 판매해서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되었고 이후 계속해서 발전했다. 양질의 책과 문서가 더욱 쉽게, 널리 보급될 수 있었고 새로운 사상, 새로운 기술도 빠르게 퍼질 수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유럽이 대단히 빠른 경제 성장과 군사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번영의 원천에는 인쇄술로 대표되는 정보의 넓은 확산이 자리 잡고 있다.
그에 비해 『상정고금예문』이나 『직지심체요절』 같은 서적은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 대중이 널리 접하기는 쉽지 않은 내용이다. 조선 시대에는 『석보상절』 같은 일부 한글 불교 문헌이 정부 주도로 인쇄됐지만 억불 정책에 따라 일반 대중에게 팔릴 상품이 되지도, 기술 발전의 동력이 되지도 못했다. 그저 정부 정책에 따라 필요한 책을 약간 만들어 낼 때 인쇄술의 발전으로 좀 더 편해졌다는 정도가 기대할 만한 효과였을 뿐이다.
20세기에 접어들어 한국은 인쇄, 출판은 물론 통신과 방송 기술에서도 세계의 선진국들과 격차를 줄이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보면, 현재 한국의 번영도 정보의 확산과 연결해볼 만하다. 한국이 기술 산업에서 탄탄한 기반을 갖고 있는 것은 결국 충실한 교육을 받은 우수한 인력을 잘 키워냈기 때문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광복 이후 지난 80년간 이런 교육과 인력 수준의 향상이 이루어진 것 역시 책·신문·방송·전자통신망 등을 통해 정보를 더 넓고, 더 멀리 퍼뜨리는 기술이 같이 자리 잡았기 때문에 가능해졌다.
21세기,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정보 통신의 시대가 닥치면서 세상은 다시 변화했다. 나는 지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미국의 빌보드 차트에서 머라이어 캐리의 크리스마스 노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다시 1위를 한 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이 노래는 1994년에 발표되어 진작에 상당한 인기를 누렸던 곡이다. 그러나 수록 앨범이 차트 1위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거의 30년이 지나 2020년대에 접어들어 이 노래는 다시 차트 1위를 차지했다. 심지어 2021·2022·2023·2024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음악이라는 정보가 퍼져 나가고 소비되는 방식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였다면 음악을 듣는 방법은 그 음악이 수록된 음반이나 카세트테이프를 매장에 가서 사서 듣는 것이었다. 이런 시대라면 문득 30년 전의 명곡이 듣고 싶다고 한들, 굳이 힘들게 매장까지 가서 30년 묵은 옛 음반을 살 마음을 먹기란 쉽지 않다. 매장에 오래된 음반이 없을 가능성도 높다.
2020년대에는 대부분 음악을 인터넷 스트리밍으로 소비하고 있다. 3년 전 음악이건, 30년 전 음악이건 스마트폰에서 손가락만 움직이면 즉시 들을 수 있다. 음악 한 번을 들을 때 지불해야 하는 비용도 매우 적다. 그러니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떠오르면 바로 들을 수 있다. 정보가 퍼져 나가는 일이 쉬워지고 정보가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는 문턱이 낮아지면서 30년 전 히트곡을 낸 옛 가수들에게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다. 그 덕분에 머라이어 캐리는 30년 전 옛 노래로 요즘 가수들보다 크리스마스에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기회를 얻었다.
나는 이렇게 인터넷을 통해 정보가 확산하는 방법이 바뀌는 중에 큰 기회를 얻은 또 다른 사람들이 바로 한국인들이라고 생각한다. K팝, 한국 드라마, 한국 영화가 해외에서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도 살펴보면 머라이어 캐리의 옛 노래와 닮은 점이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가수들이 미국이나 유럽에 진출한다고 하면 그 나라에 가서 CD를 많이 팔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지만, 지금에 비하면 반응이 크진 않았다. 미국인, 영국인들 입장에서 알아듣기도 어려운 낯선 언어로 노래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음반 한 장 만큼의 가격을 치르고 K팝이라는 상품을 소비하기에는 머뭇거려지는 면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문화에 어느 정도 호기심을 느낀 미국 소비자라고 하더라도 CD라는 매체를 구입하는 과정 자체가 일종의 문턱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격식 갖춘 문화보다 장난 영상이 더 흥행
그러나 구독과 좋아요의 시대인 2010년대 이후 K팝의 소비는 무료나 다름없는 낮은 가격에 이루어진다. ‘강남 스타일’ 같은 노래가 재미있게 느껴진다면 그냥 한번 눌러 보면 들어 볼 수 있는 시대다. 낯설고 특이하게 느껴지는 K팝이라도 그저 재미 삼아, 잠깐 호기심으로 접해 볼 기회가 생긴다. 어차피 무료로 볼 수 있는 영상이니, ‘강남 스타일’을 10초, 20초만 한번 들어 볼까 싶은 생각으로 눌러 보면 즐길 기회가 생긴다. 그 과정을 통해 K팝은 점점 더 넓게 퍼지고 결국 많은 사람 중에서 팬들을 확보해 유행을 만들어 냈다. K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돈을 내고 극장까지 가서 보는 영화만으로 유통이 이루어졌다면 낯선 한국 영화가 낯선 나라에서 퍼지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요금이 더 들지 않는 OTT 서비스를 통해 소파에 반쯤 누운 채로 손가락만 까딱여 볼 수 있는 영상이라면, 5분쯤 보고 재미없으면 도중에 안 봐도 된다면, 낯선 한국 드라마라 할지라도 세계의 많은 사람이 시도해 볼 수 있다.
이런 시대가 계속되다 보니 지금은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격식을 갖춘 만들어낸 문화 상품뿐만 아니라 어느 누가 만든 정보라도 확산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접어드는 느낌이다. 신춘문예 등단 작가가 애써 쓴 소설보다 어느 어린이가 장난삼아 부르는 랩 음악 노래 가사가 더 많은 인기를 얻어 더 큰 수익을 창출할 수 있고, 방송사에서 큰 예산을 들여 편성한 쇼 프로그램보다 어느 학생이 하굣길에 공중부양 슬링 백 춤을 추는 영상이 더 널리 퍼지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는 극소수가 만들어내는 가짜뉴스나 왜곡된 거짓 선전도 문턱 없이 쉽게 퍼져 나갈 위험이 있다. IT 재벌이 백신에 사람을 조종하는 장치를 집어넣었다는 황당한 음모론이나 심지어 지구가 둥글지 않고 평평하다고 믿는 환상적인 생각조차도 사람의 관심을 끌기 위해 설계된 인공지능 알고리즘의 힘에 따라 퍼져 나가다 보면 꽤 많은 무리의 동조를 얻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유튜브 같은 인터넷 동영상 공유 서비스는 미국 서부 샌 브루노라는 어느 소도시에서 운영되는 상업적인 사이트로 재롱부리는 고양이 영상 같은 것들을 보여주면서 좀비 사냥 게임 한번 해 보라는 15초짜리 광고로 수익을 내는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수많은 사람의 생각이 실려 유통되면서 태평양 건너 한국의 문화 저변을 바꾸고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아예 뒤집고 있다. 생각해 보면 기괴할 정도로 이상한 일이다.
나는 우리가 이런 시대에 적응하는 좋은 방법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시대의 정보 확산을 좋은 쪽으로 활용하기 위한 길을 찾아내는 일이 시급하다. 그 방법이야말로 우리가 꼭 잘 활용해야 할 21세기의 금속 활자일 것이다.
곽재식 작가·숭실사이버대 교수. 공상과학(SF) 소설가이자 과학자. 과학과 사회·역사·문화를 연결짓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괴물 백과』 『곽재식의 세균 박람회』 등을 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원자력 및 양자공학·화학을 전공, 연세대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