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 한국경제의 개척자들 – 정인영 HL그룹 창업주
산업 발전 위해 악도(惡道) 걸은 참 기업인
‘휠체어 경영정신’ 발휘한 ‘노장 관록’ 창업주
HL 그룹 창업자인 고(故) 정인영(鄭仁永, 1920~2006)은 1920년 5월 6일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 송전마을에서 농부인 부친 정봉식과 모친 한성실의 6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정인영의 형은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이다. 정순영(성우그룹), 정세영(현대산업개발), 정상영(KCC)이 그의 남동생들이다.
정인영의 선조는 함경북도 명천에서 11대까지, 이후 길주에서 4대까지 살았다. 이후 정인영의 증조부가 아산리로 옮겨 정착했다. 정인영의 조부는 마을에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이었다. 그의 부친 정봉식은 7남매 중 장남으로 근면 성실했으며, 모친은 마을에서 4㎞나 떨어진 곳에서 뽕잎을 따서 누에를 키울 정도로 부창부수였다.
정인영은 부친에게서 검약과 끈기, 신중함을, 모친에게선 적극성과 급한 성격을 물려받았다. 정인영은 일곱 살부터 열세 살까지 6년 동안 서당을 다녔는데 “송전에서 신동이 났다”고 훈장이 자랑할 정도였다. 이 무렵의 소년들은 서당에서 2~3년 동안 수학하다 보통학교로 옮기곤 했다. 그의 형 주영도 서당에서 3년을 공부한 뒤 보통학교에 다녔다. 부친이 둘째 아들은 자신의 대를 이어 농사를 짓게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정인영은 14세가 되는 해에 금강산을 처음 구경했다. 그는 웅장한 구룡폭포 앞에서 “남자의 삶은 저토록 웅혼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고 그해 여름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첫 직장은 충무로의 고물상이었다. 이후 인쇄소에서 문선공으로 일했다. 16세가되는 해에 그는 YMCA 4년제 야간반 보통학교 4학년 2학기에 입학했다. 보통학교 과정을 마친 다음에는 YMCA 부설의 영창중학교를 다녔다. 이후 18세 되던 1938년 도일(渡日)해서 다이세이 중학교 야간부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21세이던 1941년 겨울 아오야마학원 대학부에 입학해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일본 유학 시절 그는 낮에는 인쇄소 문선공으로, 새벽에는 신문배달원으로 24시간이 부족할 만큼 치열하게 살았다. 타고난 튼튼한 체력 덕분이었다.
그의 주경야독 생활은 지속되지 못했다. 일제가 황국신민화운동이란 미명 하에 조선청년들에게 징병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정인영은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 1943년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 2년 동안 신설동에서 독서로 소일하다가, 1947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3년간 정치부 기자로 근무했다. 6·25 전쟁 중에는 대구에서 잠시 〈대한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이후 부산으로 옮겨 미8군 후방기지사령부의 통역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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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현대건설은 정인영의 도움으로 주한미군이 발주한 부산 수산대학 강의실 개조공사를 맡았다. 당시 현대건설은 미8군의 각종 공사를 수주했다. 정인영의 도움이 컸다. 1951년에는 정주영 사장의 권유로 현대상운 전무로 자리를 옮겼다. 1953년에는 현대상운을 사직하고 시사주간지 〈모던타임스〉를 창간했으나 자금난으로 휴간했다. 이후 현대건설 부사장직에 취임했다.
휴전 후 고령교 복구사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현대건설은 1957년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를 계기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1960년에는 5대 건설사에 진입했다. 이 시기 마케팅 담당 CEO를 지낸 정인영은 공사수주에 탁월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로 건설 경기가 조성됐으나, 정인영은 국내보다는 해외 건설 시장에 주목했다. 현대건설이 충청북도 단양시멘트공장 건설을 위해 1961년 미국 국제개발처(USAID)에 450만달러 공공차관 도입을 추진한 게 계기였다. 당시 미국국제개발처는 현대건설이 규모가 작고 실적도 미흡하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했다. 정인영은 포기하지 않고 매일 미국국제개발처 한국지사 담당자를 찾아가 협상의 물꼬를 텄다. 결국 1961년 11월 정인영은 차관도입선을 미국국제개발처로 정하고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당시 미국 직항노선이 없던 시절이라 정인영은 김포에서 미국 워싱턴까지 30시간 날아갔다. 당시 그는 미국 보스턴과 공업지대인 피츠버그를 시찰하면서 ‘한국 경제의 미래는 중화학공업에 있다’고 확신했다.
금강산에서 다진 굳은 결심
그는 42세이던 1962년에 ㈜현대양행을 설립했다. ‘양행(洋行)’이란 5대양 6대주를 넘어 나아간다는 의미로 글로벌경영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현대건설 부사장으로 주로 해외공사 관련 일을 맡은 그는 현대양행 사장도 겸했다. 현대양행은 건설용 기자재, 건설장비, 산업기계 등을 수입하고 형석, 시멘트 등을 수출하는 등 현대건설의 수출입을 담당했다.
“언젠가는 독립해야 했다. 형과 내가 끝까지 한 울타리 안에서 사업을 같이 할 수 있으리라곤 형이나 나나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개성이 강했던 만큼 형도 누구보다 강한 개성의 소유자였다. 그런 만큼 독자적인 행로는 서로에게 발전적인 것이다.”
정인영의 회고다.
현대양행은 기술과 경험을 쌓기 위해 양식기 생산부터 시작했다. 그가 일본 니카타현을 방문했을 당시 본 양식기 공장에서 힌트를 얻었다. 당시 일본 양식기공장들은 생산량의 대부분을 미국과 유럽에 수출해 고소득을 올렸다.
1964년 6월에는 경기도 시흥군 안양읍 박달리 안양천 변의 야산자락의 2만 평 위에 공장을 짓기 시작해 그해 12월 17일 가동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숟가락, 나이프, 포크 등을 생산했다. 곧이어 주전자, 냄비 등도 만들었다. 수출량이 늘면서 직원도 400명으로 늘었다. 현대양행은 점차 선발주자이던 일본 양식기 업체들을 추월했다. 일본의 생산방식이 소규모 가내수공업인 반면, 현대양행은 현대식 시설의 대량생산시스템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품질과 가격면에서 일본보다 유리했던 것이다.
당시 정인영은 서울에서 현대건설 근무를 마치고 저녁에는 거의 매일 공장으로 갔다. 생산을 독려하기 위함이다. 1968년에는 현대양행 내에 해운부를 신설했다. 소규모이나 국제해운업을 병행함으로써 무역업을 뒷받침하고 물류비를 절감하기 위함이었다. 그해 5월에는 3000톤급 아틀라스 프로모터호를 통해 동남아 운항을 개시했으며, 6월부터는 1만톤 급을 미주지역에 투입했다. 그해 11월에는 8000톤급 아틀라스 트레이더호로 중동지역에도 진출했다.
글로벌 시장 성장 가능성 주목
1968년부터는 자동차부품 생산 준비에 착수했다. 당시 현대건설은 자동차 생산에 참여하기 위해 미국 포드(Ford)사와 자동차 조립 기술제휴를 협상 중이었다. 포드는 1966년부터는 한국 진출을 위해 한국 측 파트너를 물색하는 중이었다. 정인영이 포드와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덕분에 현대건설은 1966년 12월 현대자동차㈜를 설립하고 1967년 2월에는 포드와 자동차 조립기술 계약을 체결했다.
정인영은 현대자동차 탄생에 깊이 관여하면서 자동차 산업의 핵심은 부품에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당시 국내에는 자동차 부품업체가 거의 전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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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정인영은 안양공장의 양식기 생산라인을 자동차 부품 생산라인으로 바꿨다. 이후 전장품과 쇽업소버(shock absorber), 에어컨 등의 기술도입을 위해 당시 세계 최고였던 영국의 루카스, 암스트롱 등과 접촉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대안으로 일본 미쓰비시와 전장품을, 쇽업소버는 일본 도키코와 양호한 조건으로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했다. 1970년 2월부터 쇽업소버 생산을 개시한 덕분에 현대양행의 자동차 부품생산은 본궤도에 올랐다.
안양 박달리 공장의 자동차 부품 생산능력은 당초 3만대 규모였다. 생산 개시 불과 1년 만에 공장이 비좁아져 1970년부터 엔진, 라디에이터공장 등을 증축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에 안양공장 인근의 경기도 시흥군 남면 당정리 일대의 7만평을 새로운 공장부지로 확보하고 1970년 봄부터는 주조공장 건축을 시작했다. 기계공업은 소재생산 능력을 갖추는 것이 우선이었다. 1971년 1월부터 5톤짜리 큐폴라(cupola, 용선로)와 1톤짜리 고주파로 시설을 갖춘 주조공장을 가동해 금형소재, 덤프트럭 호일 등을 생산했다.
1972년 6월에는 중기공장을 완공했다. 아메리칸 호이스트(American Hoist)와 트럭 크레인 기술제휴 계약을 맺고 피아트앨리스(Fiatallis)와 제휴해 불도저와 휠로더(Wheel loaders)를 생산했으며, 프랑스 포크레인(Poclain)으로부터 굴삭기 기술을도입해 생산에 돌입했다. 그해 9월에는 단조(鍛造)공장을 착공함으로써 중기생산공장은 소재부터 완성품에 이르는 시스템을 모두 갖추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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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1973년 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 공업화’를 선언했다. 당시 정부의 목표는 1980년대 초까지 수출 100억달러, 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이루는 것이었다. 경공업 중심의 수출드라이브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1970년 6월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 통보에 따른 자주국방의 필요성도 한몫 거들었다. 이에 정부는 철강, 비철금속, 화학, 기계, 조선, 전자 등 6개 부문을 수출전략산업으로 선정하고 집중 육성하기 시작했다.
소재와 완제품 모두 갖춘 현대건설
이에 발맞춰 정인영은 군포의 종합기계공장을 대형화, 현대화하기로 하고 차관 도입을 위해 1973년 2월 필리핀 마닐라의 아시아개발은행(ADB)으로 향했다. 정인영은 1975년 6월 1750만 달러의 ADB차관 도입계약을 체결했다. 연리 8.25%에 3년 거치, 12년 상환조건이었다. 아울러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해 신설된 국민투자기금 1241만달러를 지원받아 총 2991만달러의 투자금을 마련했다.
이후 정인영은 1975년 6월 10일 군포종합기계공장 확충 공사에 돌입했다. 군포종합기계공장은 그로부터 4년 뒤인 1979년 2700명의 고용창출과 4575만달러의 매출, 2208만달러의 수입대체효과를 가져오는 국내 최대 규모의 공장으로 거듭났다.
그러던 중 1975년 7월 어느 날 청와대가 정인영을 호출했다. 오원철 청와대 제2경제수석의 호출이었다. 오 수석은 박 대통령의 지시라며 군포공장 건설을 중지하고 창원 기계공업단지에 다시 공장을 지을 것을 요구했다. 장고 끝에 정인영은 군포공장 건설과는 별개로 창원에 별도의 차관을 도입해서 발전설비공장을 짓기로 하고 발전설비는 현대양행이 독점생산하는 내용의 계획서를 청와대에 제출했다.
결국 정인영은 박 대통령의 재가를 얻었다.
창원기계공업단지 내에 대지 98만평, 연건평 12만 800평의 발전용 설비, 제철제강용 설비, 정유화학 설비, 펄프제조 설비, 시멘트기계제조 설비를 생산하는 공장을 1976년 11월 착공했다. 1978년 12월 준공이 목표였다. 소요자금은 1억8000만 달러로 50%는 외자, 50%는 내자로 충당하는 내용의 계획서를 1976년 1월 29일에 경제기획원에 제출했다.
1977년 6월 30일 IBRD(국제부흥개발은행)는 8000만달러의 차관 공여를 최종 승인했다. 산업은행 등의 내자 동원도 결정됐다.
128만평의 창원공장은 1978년 9월 보일러공장 준공과 함께 가동에 들어가 12월에는 기계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워낙 대공사여서 자금이 당초 계획보다 더 소요돼 일단 가동할 수 있는 분야부터 가동한 것이다. 1978년부터는 창원에 직업훈련소를 지어 기능인을 양성했다. 미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 호주 등의 기술제휴사 협조로 기술 습득을 위한 해외연수도 진행했다. 당시는 해외연수가 쉽지 않은 시절이어서 현대양행에 우수인력들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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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업 왕국의 몰락
창원공장이 부분 가동됨에 따라 정인영은 일감 확보를 위해 수차례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 1977년 7월 10일 미국의 풀러사와 공동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지잔(Jizan) 시멘트공장 및 주택 건설공사를 3억1000만 달러에 수주했다. 설계 및 감독을 맡은 풀러사의 몫은 3000만 달러였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으나 결국 정인영은 세계 유수의 업체를 모두 따돌렸다. 현대양행의 플랜트 1호 수출이자 최초의 해외공사인 턴키(turn key base) 수주였다. 또한 삼천포화력발전소의 보일러 제작공급계약을 체결하고, 1978년 11월에는 서해화력발전소의 터빈발전기와 보일러를 제작, 공급하는 등 일감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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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양행은 발전설비와 플랜트 수출에서 국내 최고의 기술력과 최대의 생산능력을 확보했다. 그러나 시기와 훼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내 중화학공업은 1973년 이후 정부의 집중적인 지원과 기업들의 경쟁적 참여로 1979년에는 중화학공업비율이 51%로 경공업을 앞질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과잉중복 투자문제가 불거졌다. 1979년 제2차 석유파동에 따른 세계경제 불황은 설상가상이었다. 중화학공업 투자 조정도 불가피했다. 특히 발전 설비 억제가 요구됐다. 1976년 6월 기계공업육성 5개년 계획과 함께 발전설비 국산화 관련 각종 지원이 화근이었다. 재계는 발전설비 제작에 경쟁적으로 참여했다. 발전설비 제작사업이 중공업의 핵심이란 점을 뒤늦게 파악한 탓이다.
중화학 투자조정이 처음 거론된 것은 1977년 5월 21일에 열린 경제장관협의회다. 정부는 이날 회의에서 현대양행과 삼성중공업에 각각 발전용 보일러와 산업용 보일러를 전문화하고 대우중공업은 이 두 회사와 중복되지 않는 분야로 유도하기로 했으나 공염불이 됐다. 신규 참여를 노리는 후발업체들의 반발과 로비에 흔들린 것이다. 정부는 일원화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5개월 후인 1977년 10월 장기경제발전계획을 내놓고 중공업 투자의 중복과잉을 부채질하는 태도를 보였다.
1978년 초에는 한국전력이 국내 원자력발전 5·6호기인 고리 원자력발전소(3·4호기) 건설 입찰을 발표했다. 발전용량 90만㎾의 원자로 2기 건설에 1억8000만 달러의 대형 프로젝트였다. 당초 발전설비가 현대양행으로 일원화돼 일감도 자연스레 현대양행 몫일 것으로 추정됐으나 물거품 된 것이다. 가격경쟁력과 독과점 폐해 시정이 이유나, 국내 대기업들의 물밑 로비 때문이라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현대양행을 비롯한 12개 국내업체가 외국 회사들을 파트너로 선정, 입찰에 참여했다.
한 달여 뒤 한국전력은 고리원전 3·4호기 실수요자로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영국 GEC를 지명했다. 이후 웨스팅하우스가 현대중공업과 손잡고 응찰해 결과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현대중공업에 낙찰됐다. 현대중공업이 입찰에 참여할 줄은 짐작도 못했던 정인영은 큰 충격을 받았다.
1979년 5월 25일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위원회(위원장 신현확)는 현대양행과 현대중공업을 1그룹으로, 삼성중공업과 대우중공업을 2그룹으로 하는 방침을 확정했다. 10일 후인 6월 5일 정부는 현대양행과 현대중공업 측에 “현대중공업이 증자를 통해 현대양행을 흡수통합해 정주영 회장이 현대양행 창원 공장의 건설·운영을 책임진다. 현대양행은 재무구조의 내실을 기할 수 있도록 창원사업과 관련이 없는 인천조선, 한라시멘트, 카프로락탐 등 3개 회사를 1980년 6월까지 처분토록 한다”는 내용을 통보했다. 정인영은 정부에 읍소하다시피 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1979년 7월 20일, 정부 지시로 현대양행의 창원공장 경영권은 현대중공업으로 넘어갔다. ‘선통합, 후정산’하기로 합의, 창원공장과 한라건설, 한라건축, 한라엔지니어링을 현대중공업에 넘겨주고 사우디아라비아 지잔(Jizan) 시멘트공장 건설공사, 삼천포화력발전소 공사 등 국내외 공사 4000억원도 함께 넘겼다.
창원공장의 경영권을 넘긴 정인영은 현대그룹과 완벽히 결별했다. 1980년 11월 현대양행의 창원공장과 군포공장은 대우로 넘어가 ‘한국중공업’으로 상호가 변경됐다.
현대양행을 빼앗긴 뒤 정인영에 남겨진 사업체는 만도기계, 한라해운, 한라자원, 한라시멘트, 인천조선이 전부였다. 그중 제대로 돌아가는 것은 한라해운 뿐이었다. 정인영은 한국중공업을 포기하고 한라로 되돌아온 임직원 18명과 함께 서울 압구정동배나무밭 언덕 위의 2층 자택에서 재기를 준비했다.
‘배나무밭 신화’의 시작이었다.
이후 한라자원은 파푸아뉴기니에서 원목개발을 개시했다. 한라해운과 연계할 수 있는 사업이어서 바로 시작할 수 있었다. 1979년 말 수출입은행에서 1365만달러를 확보한 한라자원은 파푸아뉴기니 정부와 협상해 제주도 면적과 맞먹는 18만 헥타르의수립개발권을 확보하고 원목수입과 우드칩 생산에 착수했다. 1983년 파푸아뉴기니 정부의 제동에 국제목재경기 퇴조로 고전했으나, 다행히 1990년대에는 경영이 정상화됐다.
18인의 배나무밭 신화
한라조선은 1976년 7월에 인수한 2000톤급 소형선박 제조 및 수리업체인 협진엘리코트를 인천조선으로 변경한 것이다. 창원공장 때문에 한동안 방치했다가 1982년 2월부터 연간 180만톤의 건조능력을 갖춘 조선소로 확대 작업을 추진했다. 정부 허가가 관건이었다.
당시 정부는 조선업 과잉투자 현상과 더불어 간만의 차가 크고 수심이 얕은 인천이 조선소 입지로 불가하다며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끈질긴 설득 끝에 허가를 받아 금융권 대출로 1983년에 완공했다. 그렇게 연간 3만톤급 조선을 6척 건조할 수 있는 국내 5위 규모의 조선소가 탄생했다. 정인영은 이후 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남양리의 자병산 자락에 위치한 한라시멘트의 옥계공장 공사를 다시 시작했다. 당시 옥계공장은 착공 1년 6개월만인 1979년 9월 공사가 60% 진척된 상태에서 중단된 상태였다.
정인영은 사이가 좋지 않은 5공 정권을 어렵게 설득해 외환은행의 지급보증으로 장기신용은행과 산업은행에서 320억원을 지원받아 1985년 5월 연산 120만톤의 시멘트공장을 완공했다. 1988년부터 증설공사에 착수, 2년만에 연산 480만톤 규모로 확대해 시멘트업계의 선두주자가 됐다.
만도기계는 1979년 15만대 분량의 자동차부품 생산능력을 확보했으나, 1984년 연산 30만대로 확장했다. 안양공장이 협소해 1986년 3월에는 평택공장을 완공하고 안양공장의 공조품 제작설비를 이전했으며, 1986년 6월에는 경주에 전장품 공장을 완공했다. 1988년에는 강원도 문막에 주물품 공장을 완공하고 충남 아산공장(공조품), 전북 익산공장(완충품)을 완성했다.
정인영은 1989년 7월 23일 돌연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100일만에 퇴원한 뒤에도 그는 휠체어를 타고 경영일선에서 사업을 진두지휘했다. 정인영의 지도 하에 만도기계는 1990년대 한라공조와 캄코, 한라일렉트로닉스를 설립, 자동차 부품 생산 영역을 확대했다. 1990년 10월에는 문교부로부터 학교법인 ‘배달학원’ 설립을 인가받고 1995년 2월에는 원성군 흥업리 문필봉 자락에 한라공과대학(한라대학교)을 준공했다.
포기를 모르는 ‘중화학공업 선구자’
정인영의 도전은 계속됐다. 이번에는 중공업왕국 건설에 도전했다. 1991년 그는 전남 영암군 삼호면 용당리 바닷가의 88만3000평을 확보, 중장비 기계공장과 조선 및 플랜트 공장을 건설했다. 1995년에는 삼호조선소를 가동하고 충북 음성군 소이면에 중장비공장을 건설했다. 1994년 8월에는 전남 영암군 삼호면에 조성된 대불공단 내에 한라펄프제지를 설립해 1996년에는 신문용지 연산 25만톤을 확보했다.
그 결과 한라그룹은 1995년 기준 매출액 4조 3600억원을 달성했다. 이듬해 1996년 한라그룹은 재계 11위(매출액 기준)에 올랐다. 현대양행을 빼앗긴 지 15년 만에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겐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외환위기 와중인 1997년 12월 6일 한라그룹이 부도를 맞은 것이다. 조선업 경기가 가라앉은 데도 세계최대 규모의 삼호조선을 건설하느라 자금난에 몰린 것이다. 한라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한라제지, 한라공조 등 10여 계열사들을 해외에 매각하고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쳐 기사회생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한라그룹의 재기 노력을 구조조정의 모범사례라며 격찬하기도 했다. 〈이한구 ‘한국재벌사’ 2004〉 삼호중공업의 경영권은 이후 현대중공업으로 넘어갔다.
정인영은 2006년 7월 20일 87세로 타계했다. 그는 대한민국이 살 길은 오로지 산업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다는 신념으로 한국의 산업구조를 경공업에서 중공업으로 고도화시킨 선구자였다. 그는 한라그룹을 키우는 과정에서 숱한 정치적 시련을 겪었으나 결코 음지의 권력과 야합하지 않았다. 말년에는 ‘부도옹(不倒翁)’의 별명에 걸맞게 휠체어와 지팡이에 의지하면서도 한라의 재기를 위해 고군분투했다. 1997년 말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수많은 대기업 집단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한라는 부활했다. 정인영은 좌우명인 “Dream it, believe it and just do it”을 몸소 실천했던 참된 기업가였다.
이한구 수원대 명예교수 219hklee@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