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현지시간) 제 47대 미국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식 직후 무더기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가치 동맹’을 내세웠던 전임 바이든 행정부의 국정기조를 하루만에 ‘미국 최우선주의’로 전환했다.
트럼프는 이날 미 의회 중앙홀인 로툰다에서 거행된 취임식 내내 바이든 전 대통령을 면전에 두고 “급진적이고 부패한 정권이 시민의 권력과 부(富)를 빼앗아가면서 사회의 기둥은 부러지고 완전히 무너졌다”는 맹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바이든 전 대통령 부부가 헬기를 타고 워싱턴을 떠나자마자 지지자 2만여명이 운집해 있는 백악관 인근 ‘캐피털원 아레나’에 책상을 설치해 놓고 바이든이 만든 행정명령 78건을 무효화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를 통해 미국은 세계보건기구(WHO)와 파리 기후변화협정의 재탈퇴를 공식화했다. 미국은 트럼프 1기 때 이들 2개의 기구에서 탈퇴했다가 바이든 행정부 때 재가입했는데, 트럼프의 재집권으로 국제기구에서 재차 탈퇴하는 수순을 밟게 됐다.
트럼프는 또 바이든이 퇴임 직전 쿠바를 테러지원국에서 제외하는 행정명령을 철회했고, 해외 개발원조도 90일간 중단시키는 한편 바이든이 없앤 사형 제도도 복원했다.
취임 첫날 진행된 트럼프의 '폭탄' 행정명령은 저녁까지 계속됐다. 그는 취임식 일정을 마치고 무도회가 시작되기 직전 백악관에 복귀하자마자 집무실로 기자들을 불렀다. 집무실 책상엔 46건의 새로운 행정명령서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트럼프는 기자들과 문답을 나누며 행정명령에 하나하나 서명하는 ‘2차 행정명령 쇼’를 이어갔다.
트럼프는 먼저 1·6 의회 난입 사태로 유죄를 선고받은 자신의 지지자 1500여명을 사면하고 14명을 감형했다. 당시 사태로 경찰 140명 이상이 부상하고 시민 4명과 경찰 5명이 사망했지만, 트럼프는 이날도 “당시 대선은 완전히 조작됐다”는 주장을 반복했다.
경제와 관련해서 ‘미국의 에너지 해방’을 위해 천연자원 개발을 전면 허용하는 한편, 전기차 의무화 조치를 철회시켰다. 통상과 관련해선 기존의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적절한 개정을 지시했고, 무역적자와 관련해서 상대국의 환율 정책에 대응까지 지시했다. 미국과 FTA를 맺고 있는 한국도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은 미국의 8번째 무역 적자국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특히 캐나다와 멕시코에 부과하겠다고 예고한 25% 관세에 대해 “2월 1일에 (부과)할 것”이라며 관세 부과 시기까지 밝혔다. 다만 보편 관세에 대해선 “조속히 부과할 것”이라면서도 “아직 준비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는 문답 과정에서 북한을 ‘핵보유국(nuclear power)’으로 지칭하며 논란을 일으켰다. 핵보유국은 이스라엘과 인도, 파키스탄 등 사실상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평가되는 국가를 뜻하는 외교 용어로, 트럼프는 명시적으로 이 용어를 쓴 적이 없다.
트럼프는 “그들(바이든 행정부)은 그게(북한이) 엄청난 위협이라고 생각했다”며 “이제 그(김정은)는 뉴클리어 파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정은은 나를 좋아했고, 내가 돌아온 것을 반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며 대북 대화 재개 가능성을 시사했다.
만약 트럼프가 의도적으로 핵보유국이란 용어를 썼다면 향후 대북 대화의 목표는 비핵화가 아닌 핵동결이나 감축으로 변경될 가능성이 있다. 앞서 지난 14일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지명자 역시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칭하면서 트럼프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가 수정됐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편 미 상원은 이날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외교 수장 역할을 맡을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지명자의 인준안을 99표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트럼프 행정부 내각 인사 가운데 상원 인준을 통과한 것은 루비오가 처음이다. 그는 지난 15일 청문회에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는 환상”이라는 민주당 의원의 발언에 대해 “궁극적으로 미국에 대한 우발적 전쟁의 위험을 낮추기 위해 무엇을 할지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 역시 대북 전략의 변화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