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의 지속가능성’은 유럽 농업계를 뜨겁게 달구는 주제다. 특히 환경에 부담을 줄이는 지속가능한 발전과 농민생계 보호라는 두 주제는 서로 들어맞지 않는 두 톱니바퀴 같은 관계라고 할 수 있다. 2019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네덜란드 농부들의 트랙터 시위도 사실 이러한 주제와 관련이 깊다.
최근 이같은 갈등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정책이 유럽에 도입됐다. 바로 ‘기업의 지속가능성 보고지침(CSRD)’이다. CSRD는 유럽 경제권에서 수익을 창출하는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들에 적용되는 새 보고 기준이다. 이에 따르면 기업들은 환경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자세히 기록해 보고해야 한다. 내년부터는 직원수 250명 이상, 일정 규모 이상 수익을 내는 기업들은 CSRD를 따라야 한다. 적용 대상은 순차적으로 확대된다.
직접적인 적용 대상이 농민이 아닌데도 농업계에서 CSRD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정책의 핵심이 온실가스 배출과 에너지 소비 보고 조항에 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의 농업기술기업 팜어블의 분석에 따르면 농식품기업체들의 온실가스 배출량 중 64%가 원재료 공급을 담당하는 농장들에서 발생한다. CSRD 적용 대상이 되는 농식품기업들이 필수적으로 보고해야 하는 항목에 농장들이 깊숙이 관여돼 있는 셈이다. 실제로 농식품기업들은 새 보고지침을 준수하기 위해 농민에게 다양한 환경 데이터를 요구할 가능성이 커졌다.
팜어블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 농업기술기업과 농업 관련 언론매체는 CSRD 정책이 농민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농민이 수집해야 하는 정보의 다양성·정확성, 그리고 기업의 환경 관련 요구사항이 증가할 수 있다고 봤다. 더욱이 이 정책은 2030년엔 중소기업에도 적용된다. 이는 데이터와 친환경농업에 대한 요구사항을 더욱 증가시켜 결과적으로는 데이터 수집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전문성을 확보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시간이 농민에게 전가될 것이란 전망이다.
CSRD가 농민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네덜란드의 농업매체 ‘니우베 오흐스트’는 친환경농산물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농민들이 이 정책으로 경쟁 우위를 얻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농식품기업들의 환경친화적 생산 방식에 대한 정보가 증가하면 관련 농가들에게 유리한 시장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매체는 농민들이 데이터 기반의 친환경재배로 경쟁력을 갖추게 되면 가격 협상에서도 일정 부분 우위를 점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이상적인 관측도 제시했다.
CSRD 정책은 2019년 트랙터 시위를 촉발했던 질소 배출 감축 정책과는 달리 농민들을 직접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또한 이 정책이 농민들에게 미칠 궁극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의 시각이 공존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과 농민생계 보호 간의 갈등은 여전히 유럽 농업이 풀어가야 할 중요한 숙제로 남아 있다.
천민조 네덜란드 AERES 응용과학대학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