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인권투쟁가가 싸운다면 살만한 지옥이겠죠”…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의 ‘여자 대통령 만들기’

2025-08-31

2021년 11월, 장거리연애 중이던 애인에게 이별을 통보받았다. 홧김에 진보정당 S후보의 대선 캠프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한국이 싫어서 다른 사회로 떠나는 길을 택했다는 전 애인에게 ‘한국을 고쳐 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활동가인 심미섭씨(34)의 이야기다. 그는 캠프에서 ‘위원장 말씀자료’처럼 남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글을 쓰는 일을 맡으며 ‘나의 목소리를 빼앗기지 않는 방법’을 고민하다 일기를 썼다고 했다. 이 일기를 토대로 지난달 책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을 펴냈다.

왜 그는 한국을 떠나는 대신 고쳐 쓰고 싶었을까. 지난 20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심씨는 “한국이 너무 좋아서라기보다는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해보고 싶어서”라고 했다. “가끔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을 하는데 문제가 있어서 문제제기를 하면 관리자들이 ‘마음에 안 들면 근무 취소하고 가세요’ 이런 식으로 이야기해요. 문제제기를 하면 ‘그럼 일하지 말라’고 하는 게 황당하죠. 쿠팡과 싸우는 게 쿠팡이 너무 좋아서는 아니잖아요. 한국을 떠나서 리셋하는 것보다는 투쟁의 주체로 살고 싶어요.”

그가 상상한 ‘고쳐 쓴 한국’의 첫 장면은 ‘여자 대통령’이었다. “박근혜도 여자였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그는‘어떤 아버지의 딸’이잖아요. 페미니스트의 이름으로 ‘딸들의 어머니’인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책에서 ‘대선후보 S’로 표현된 심상정 전 정의당 대표에 대한 감정도 특별했다. 심씨는 경기 고양시에서 자라며 청소년기부터 지역구 의원인 S를 지켜보며 ‘정치인은 중년 남성’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났다고 말했다. 제19대 대선 토론에서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상대 후보의 발언에 S가 단호하게 반박하는 모습을 보며 퀴어 당사자로서 일종의 부채감을 느끼기도 했다.

당시 대선에서 S는 기대보다도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대선이 끝나고 3년간 많은 일이 벌어졌고 비상계엄 사태가 터졌다. 활동가로서도, 시민으로서도 절망적일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심씨는 지난 겨울 탄핵 광장에서 ‘사회는 바뀌어가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말했다. “8년 전 박근혜 탄핵 집회 때는 여성이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이나 차별, 성추행 같은 일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 일을 방지하는 ‘페미존’을 만들기도 했어요. 지난해 비상계엄 날 여의도에 갔는데, 어떤 참가자가 ‘이건 쥴리 계엄이다. 쥴리가 옆에서 술 따르면서 속살속살 얘기해서 대통령이 계엄을 한 것’이라고 하니 광장에서 사람들이 웃더라고요. 그때는 8년간 변한 게 하나도 없는 줄 알았어요.” 얼마 뒤 그가 자유발언대에서 “투쟁 현장에서 여성이나 성소수자를 혐오하지 말자”는 발언을 했을 때도 분위기가 한순간에 싸해졌다. 몇몇 청중은 얼굴을 찌푸리며 “끌어내려라”라고 외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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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발언대에서 내려온 뒤에는 응원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무대 바로 앞에 앉아있는 조직된 참가자들이 아닌, 대열 맨 뒤쪽 멀리 있는 사람들은 제 발언이 들렸을 때 환호했다고 하더라고요.” ‘무대 앞’이 아닌 ‘대열 가장자리’로부터 찾아온 변화는 실제로 광장을 바꿔나갔다. 혐오발언하지 않기, 소수자 배제하지 않기 같은 원칙들이 빠르게 광장에 자리잡았다. 그는 “예전에는 페미니즘 시위에서 자주 인용되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슬퍼하지 마라, 네가 바뀌었다’는 구호를 그냥 위로의 말이라고 생각했다”며 “이번 탄핵 광장을 계기로 ‘개개인이 바뀌어 있으면 사회의 변화는 한순간에 따라오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낮에는 여자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밤에는 레즈비언 데이트를 한 117일”이라는 공식 홍보문구처럼, 책은 정시퇴근과 주5일 근무를 사수하는 진보정당 당직자의 일상과 노동, 젊은 레즈비언의 연애사를 자유롭게 오간다. 그는 그동안 가시화되어있지 않았던 레즈비언의 성애적 측면을 드러내기 위해 섹스 이야기를 일부러 힘줘서 썼다고 했다. 심씨는 “게이들이 항문성교를 한다고 혐오당한다면 레즈비언들은 ‘자매처럼 친한 것과 뭐가 다르냐’는 식으로 없는 사람 취급당하기 때문에 일부러 더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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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보도자료를 위원장이 직접 단톡방에 올릴 수 없다’는 당황스러운 이유로 실무자인 심씨가 주말에 업무연락을 받는 내용, 당직자 간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던 불합리함 등 진보정당 노동자로서 겪었던 부조리도 등장한다. 심씨는 그럼에도 “일관성 있는 부정의보다 자기모순이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시퇴근을 못하거나 주말에 근무를 하는 부당한 일이 생겼을 때, 그 정당에서는 적어도 목소리를 내고 비판하면 들어주는 사람이 있었어요. 오히려 숨구멍이 있어서 문제제기가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심씨는 “지옥인권투쟁가들이 지옥 인권을 보장하라고 싸우고 있다면 그 지옥은 살만한 지옥이다”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지옥인권투쟁가’라는 말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2016년 페미니스트 정치 세력화를 목표로 ‘페미당당’을 결성했고, 임신중지권 등 다양한 여성의제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왔다. 철학을 전공한 것도 자신의 정체성 중 하나라는 그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의심하는 삶의 태도가 철학이라고 수많은 죽은 백인 남성들이 말해왔는데, 페미니즘을 접한 뒤 ‘어, 그게 바로 페미니즘인데?’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통쾌했다”고 말했다.

활동가로서 사는 것이 힘들지는 않냐는 질문에 심씨는 “힘들긴 하지만 어렵지는 않다”고 말했다. “활동가 멋있다고 하면 저는 같이 하자고 권유해요. 띠를 두르고 싸우러 나가는 것뿐 아니라 일상의 작은 실천도 페미니즘이거든요. 남초사회에서 매일매일 출근하며 때로는 타협하면서도 때로는 싸우는 제 친구들이 진짜 페미니스트고, 그들도 ‘활동’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 이성현 플랫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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