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K컬처 한류의 디스카운트는 없다

2024-12-13

작금의 정국이 요동치는 탓에 세계 무대에서 무섭게 분출한 K컬처 한류의 기세가 꺾이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현장에 있는 나도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비상계엄 발동과 해제가 있던 ‘서울의 밤’을 지새고 출근하자마자 내가 챙긴 일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바투 예정된 우리 정기 공연에 참여할 외국 객원 연주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오지 않겠다면 어쩌나 동향을 살피는 일이었다. 나라 밖에 머물러 있는 음악감독의 반응도 궁금했다. 또 하나는 환율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일이었다. 내가 맡은 단체에서는 유럽과 미국 등 외국 업무가 좀 있어서 환율 변동에 민감한 편이다.

계엄 사태에도 연말 공연 취소 없어

우리 문화예술 놀라운 회복력 지녀

글로벌 팬덤이 한류 지속에 큰 역할

한류는 이미 품질보증된 문화상표

다행히 우려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등 외국의 저명한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는 객원 연주자들은 아무 일 없는 듯 정기연주에 합류해 열연을 펼쳤다. 강한 책임감으로 무장한 우리 음악감독은 “한국은 강하다”며 말을 아꼈다. 환율도 비교적 안정을 찾아 원만한 지출이 이루어졌다. 급박한 사태에 한국의 문화예술이 보여주는 놀라운 회복력은 비단 우리 단체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연말 공연에 무더기 예약 취소 사태가 벌어진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되돌아보건대 K컬처가 일군 한류는 갖은 시련과 악조건을 딛고 활활 피어올랐다. 흔히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하는데, 한류의 형성과 발전의 역사에도 딱 들어맞는 말이다. 우리 사회가 어려움에 직면한 고비마다 문화예술이 보여준 공적인 기여도와 회복력은 어느 산업 분야 못지않게 높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 올린 금자탑이 한류다.

우리나라 경제가 극적인 수렁에 빠졌을 당시 한류가 탄생한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1990년대 말 IMF 구제금융이 닥쳤을 때, 정부는 문화예술 예산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역발상으로 대응했다. 이때 처음으로 문화예술 예산이 정부 전체 예산의 1%를 넘었다. 한편으로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영화 스크린쿼터제 축소 등으로 글로벌 경쟁에 뛰어들었다. 나중 한류의 동력이 된 기획이었다. 그 역동적인 현장을 생생히 지켜본 나는 ‘모든 한류의 현재는 1990년대’라 정의한다.

정부의 뒷받침과 기업 등 민간의 역할 증대로 순항하던 문화예술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잠시 주춤한다. 국정 기조로 내세운 문화융성은 좋았으나 기업의 협찬 문제가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자 ‘문화예술에 대한 기업 협찬’도 크게 위축됐다. 꽤 긴 시간이 필요했으나 깊은 상처가 아물면서 요즘 들어 기업의 협찬과 후원도 정상 궤도에 진입했다.

그 사이 이미 글로벌화한 K컬처 한류는 코로나19의 창궐도 빚어진 팬데믹 상황에서 또 한차례 전기를 맞는다. 비대면 사회가 되자 현장이 생명인 공연예술이 직격탄을 맞는 듯했으나 촘촘히 형성된 공적 지원망은 어둠의 심연을 밝히는 등불이 됐다. 게다가 K컬처 한류는 오래전 탄탄히 구축한 초고속전송망을 통해 세계 곳곳으로 파고들었다. 이 무렵 BTS(방탄소년단)는 변방의 보이밴드를 넘어 월드 스타로 우뚝 섰다.

지금 안개 속에 갇힌 정국이 그동안 역경을 딛고 쌓아 올린 ‘K컬처 한류의 금자탑’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늠하긴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예의 역사에서 보듯이 우리의 문화예술은 이미 강하고 놀라운 회복력이 있다는 점이다. 또한 스스로 우리의 문화예술을 찾아서 즐기는 두터운 글로벌 팬덤이 있는 한 한류의 기세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한강 작가의 경우도 한류에 매료된 외국인 번역가의 자발적인 관심에서 촉발됐다고 나는 이해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셀럽의 인터뷰 중에서 잊지 않고 기억해 놓고 적절한 기회에 인용하는 말이 있다. BTS의 리더 RM이 지난해 3월 스페인의 유력지 ‘엘 파이스’에서 밝힌 내용으로 이미 많은 미디어에서 언급했다. RM이 전한 K팝과 한류에 대한 함축적인 메시지는 너무나 감동적이고 뜨거운 것이어서 이참에 다시 환기하고자 한다.

“스포티파이(음원 스트리밍 서비스)가 우리 모두를 K팝이라 부르는 것에 질릴 수도 있지만 그것은 프리미엄 라벨이다. 우리 조상들이 싸워 쟁취하려고 노력했던 품질보증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자신감과 우리 문화예술이 가진 질기고 견고한 회복력이 있는 한 아무리 혼돈의 정국이라도, 단언컨대 글로벌 무대에서 K컬처 한류의 디스카운트는 없다.

정재왈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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