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보장 제도의 발명

2024-07-01

[문정주의 의료와 사회-4]

본지에 이탈리아 공공의료 제도를 소개하며, 신선한 반향을 이끌어 냈던 문정주 선생이 다시 새롭게 연재를 시작한다.

요즘처럼 우리 사회가 의료에 관심이 높아진 적이 없다. 코로나19 펜데믹, 소아과 오픈런과 응급실 뺑뺑이, 정부의 무지성적인 의대 정원 2천명 증원으로 촉발된 전공의 파업 그로 인한 연쇄적 의료대란 등으로 말이다.

문정주 선생은 『문정주의 의료와 사회』이란 이름으로 현대 의료의 역사와 발전, 의미를 짚고 인권으로서의 건강권, 그러한 측면에서의 우리나라 의료와 의료제도를 점검하고 문제점과 해결방향을 제시할 예정이다.

『문정주의 의료와 사회』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청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쓰여졌다.

참고로 문정주 선생은 공공의료 연구자·가정의학과 전문의로. 종합병원 임상 의사로 12년을, 보건소 공무원으로 10년, 보건복지부 공공의료지원단 연구원으로 10년간 일한 뒤 서울의대 겸임교수,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임감사를 지냈다. 현재는 전북 임실에서 글을 쓰면서, 계절에 따라 변하는 날씨와 햇살, 그리고 농사 일에도 잠깐씩 한눈을 팔고 있다.

*연재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편집자 주

19세기 산업혁명 시기의 유럽을 그린 그림에는 공통점이 있어. 도시가 화려하고 번잡한 거야. 넓은 길 양옆으로 건물이 으리으리하고 쇼윈도에는 아름다운 상품이 즐비해. 멋진 옷을 입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길 가운데로 각양각색의 마차가 오고 가.

그 시대의 어느 도시, 어느 추운 날이었어. 길 한쪽에서 “성냥 사세요!”라 외치는 여자아이가 있었어. 큼직한 바구니를 든 채 지나가는 사람에게 성냥을 내밀며 서성였어. 한참을 그렇게 해도 성냥은 팔리지 않았어. 어느 순간 아이는 마차를 피하려다 넘어져 뒹굴면서 신발을 잃어버렸어.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돈을 못 벌고 집에 가면 술에 취한 아빠가 때릴 거라 갈 수가 없어. 어느새 날이 어둡고 지쳐버린 아이는 구석진 곳을 찾아 웅크리고 앉았어. 손을 녹여 보려고 성냥불을 켰는데 환한 불 속에 뜻밖에도 아이가 바라는 게 보여. 성냥불 하나에 따뜻한 난로, 성냥불 하나에 맛있는 음식과 예쁜 크리스마스트리, 그리고 세 번째는 돌아가신 외할머니! 다정했던 할머니가 반가워 아이는 그 모습이 사라지지 않게 하려고 성냥을 다발로 움켜쥔 채 켜고 또 켰어. “할머니, 절 두고 가지 마세요, 저도 데려가 주세요.”라고 하면서. 다음 날 아침, 아이는 죽어 있었어. 타다 남은 성냥개비 속에서.

이 슬픈 이야기가 덴마크의 동화 작가 안데르센(1805~1875)이 쓴 『성냥팔이 소녀』야. 가난하고 힘들게 자라났던 그는 화려한 도시 뒷면에 감춰진 슬픔을 이야기에 담았어. 아이들에게도 현실을 숨김없이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벼랑 끝 사람들

당시 노동자 가족의 삶은 벼랑 끝에 선 듯 위태로웠어. 그들 대부분은 얼마 전에 농촌에서 쫓겨난 농민이었어. 지주들이 농장을 대규모로 넓혀 돈벌이 농업을 하려고 전통적으로 땅을 일구며 살아온 소작인을 몰아낸 거야. 재산도, 기술도 아무것도 없이 갑작스레 쫓겨난 사람들이 갈 곳은 도시 변두리뿐이었어. 더러운 빈민가에 짐을 풀고 탄광이나 공장에서 일했어. 온종일 일해도 받는 돈이 매우 적어 아빠뿐 아니라 엄마와 아이들까지 노동해야 겨우 먹고 살았어.

일터의 환경은 거칠었어. 탄광에는 석탄 가루와 먼지가 가득해 숨이 갑갑했고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가 빈번해 다치거나 죽기도 했어. 공장에서는 시끄러운 기계 소리 속에서 독한 물질을 만져야 했어. 장시간 노동에 쉴 틈도 없었어.

그 동화에서 아이의 엄마는 이미 죽었다고 해. 아마 제대로 먹지 못해 약해진 몸으로 병에 걸려 죽었거나 아이를 낳던 중에 죽었을 거야. 아빠들도 거친 노동을 힘겹게 버텼어. 그러다가 다치거나 병을 얻으면 공장에서 해고당했어. 실직한 술주정뱅이 아빠가 애꿎은 가족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광경은 흔히 있었어.

그런데 당시 이러한 모든 것을 ‘당사자 책임’이라 했어. 대를 이어 농사짓던 땅에서 느닷없이 쫓겨나도, 노동해서 받는 돈이 너무 적어 굶주려도, 병에 걸리거나 다쳐도, 그 모두가 당사자의 책임이라며 권력층은 무관심했어. 농장주, 공장주, 자본가는 모두 자기들의 재산을 늘리는 데만 바빴어.

노동자에게는 질병과 실직에 대한 대비책이 절실했어. 어디 기댈 데가 없으니 ‘당사자들’의 힘이라도 모아야 했어. 그래서 협동조합이 생겨났어. 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조금씩 돈을 모아 기금을 쌓는 거야. 그랬다가 갑자기 아프거나, 다쳐서 일할 수 없거나, 실직한 사람이 있으면 생계비를 내주었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하지? 맞아, 지금의 보험이 하는 일을 조합이 한 거야. 지역마다 ‘서로 돕는 조합(상조회, 공제조합)’, ‘친구가 되어주는 조합(우애조합)’이 있어 노동자의 삶에 버팀목이 되어주었어.

하지만 조합의 역할에는 한계가 있었어. 대부분 규모가 작고 기금도 빈약한 탓에, 곤란에 빠진 조합원에게 생계비를 넉넉히 내주지 못했어. 게다가 아무나 조합원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어. 일자리가 불안정하거나 조합비를 낼 능력이 없으면 아예 조합에 가입할 자격이 없었어. 그런 사람에게 세상은 살얼음판과도 같았어.

혁명에 나서다

노동자들은 깨닫게 되었어. 국가가 자신들의 가난한 삶에 책임이 있다는 걸 말이야. 이른바 산업혁명이라는 그 시대의 변화는 몇몇 소수에게 부자가 될 기회를 주고, 대신에 수많은 사람을 빈곤으로 내몰았어. 그런데도 국가는 ‘자유’를 위한다며 부자의 이익만을 옹호했어. 불만과 분노가 커지면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법을 바꾸는 일에, 국가를 달라지게 하는 일에 나섰어.

그 시작은 영국의 참정권 운동이었어. 19세기 초에 영국 인구는 1천6백만 명이었는데 선거에 투표할 수 있는 유권자는 고작 16만여 명뿐이었어. 소수가 권리를 독점한 데 대해 비난이 쏟아져도 법을 고쳐야 할 의회는 냉담했어. 그러자 1836년에 런던노동자협회가 『인민헌장』을 발표해. 첫 번째 요구가 뭔 줄 알아? ‘성인 남자의 보통 선거권’이었어. 지금 보면 남자의 권리만 요구하는 게 이상하지만, 당시에 그 말은 ‘부자든 가난한 자든 투표할 권리’를 달라는 뜻이었어. 곳곳에서 집회가 열리고 군중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법 개정을 청원하며 서명했어. 서명한 숫자만 5백만이 넘어.

1848년이 되자 여러 나라에서 민중 혁명이 일어났어. 프랑스에서는 경제가 불황에 빠져 대규모로 실직한 노동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어. 바리케이드를 친 그들은 군주제 대신에 공화제를, 선거에 참여할 권리를, 노동자가 단결할 권리를 요구했어. 독일에서는 노동자, 수공업자, 소상인, 농민, 지식인이 다 함께 일어났어. 그때까지 독일은 귀족이 평민을 지배하는 사회였어. 수십 개로 나뉜 영토마다 영주인 귀족이 있어 왕처럼 권력을 휘둘렀어. 억눌렸던 사람들은 집회를 열고 시민의 권리 보호, 헌법 제정, 재판 제도의 개혁, 노동자의 단결권을 요구했어. 이러한 집회는 독일 전체로 번졌어.

요구가 순순히 받아들여졌을까? 전혀 아니었어. 처음에 권력층은 집회와 시위의 엄청난 규모에 당황해 물러섰지만, 곧 군대를 동원해 진압에 나섰어. 프랑스의 격렬했던 혁명은 총과 대포에 수천 명이 목숨을 잃으면서 반년 만에 끝났고, 독일의 집회와 시위도 2년을 이어갔지만 결국 영주들의 군대에 짓밟혀 막을 내렸어. 영국에서도 수많은 활동가가 감옥에 끌려가고 먼 식민지로 추방당했어.

국가가 보장하다

비록 실패했지만, 혁명이 끼친 영향은 컸어. 우선 권력층도 다수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어. 한편에서는 사회주의가 퍼져나갔어. 노동자들이 헌법이나 선거권에 대한 요구에서 나아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며 경제적인 평등을 추구하는 이념을 지지하게 된 거야.

첫 사회주의 정당이 1869년에 독일에서 조직되었어. 마침, 독일은 오랜 숙제였던 통합을 이루어 가던 때였어. 수상인 비스마르크(1815~1898)는 강한 나라를 만드는 일에 그 정당이 걸림돌이라 여겼어. 그가 사회주의자를 탄압하는 법을 만들어 활동을 금지하기까지 했지만, 당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졌어.

비스마르크는 다른 방법을 궁리했어. 노동자를 국가에 충성하게 하려면 사회주의자에게서 분리해야 하고, 그걸 위해서는 노동자가 바라는 것을 국가가 해 주어야 한다고 보았어.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노동자의 생계를 보호할 국가 보험’이었어. 노동자에게 의료 이용을 보장하는 보험과 산업재해를 당하거나 실직했을 때 생계비를 내주는 보험을 국가가 만들어 관리하는 거야.

의회를 설득해서 그는 의료, 산재, 연금 등 보험 3총사를 준비했어. 국가 보험이므로 공제조합이나 우애조합의 보험과는 달랐어. 첫째, 매월 내는 보험료를 노동자뿐 아니라 고용주와 국가가 나누어 부담하는 거야. 둘째, 소득이 일정 수준 이하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데, 이에 해당하는 사람이면 빠짐없이 가입시키는 강제보험이야.

그중 의료보험이 1883년에 가장 먼저 시작돼 아픈 사람에게 의사의 진료와 입원을 보장해 주었어. 당시에 의사에게 진료 받으려면 돈이 많이 들어서 환자는 돌팔이 의사를 찾거나 엉터리 약을 사 먹곤 했어.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혼자서 치르다가 목숨을 잃는 일도 드물지 않았어. 그랬던 사람들이 이제 돈 걱정 없이 의료를 이용하고, 아파서 일할 수 없는 동안 생계비로 상병수당도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든든했겠어.

비스마르크가 궁리해 낸 ‘다른 방법’이 놀랍지? 최초로 국가가 책임지는 보험이었고, 최초로 노동자를 위한 국가의 사회보장제도였어. 당연히 이 제도는 환영받았어. 비록 권력층의 지배 질서를 지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지만, 노동자는 이 제도가 생계를 안정시켜 줄 것을, 기업가는 이 제도로 노동자의 사기가 올라 생산성이 높아질 것을, 자본가는 계층 간 갈등이 누그러질 것을 기대했어.

국가가 직접 공급하다

20세기 초, 새로운 의료보장 제도가 또 한 번 나타났어. 의료보험을 국가가 관리하는 것이 독일식이라면, 여기서는 아예 의료를 국가가 직접 공급해. 국가가 의료계획을 세우고, 조직을 만들고, 의사를 배치하고, 병원을 관리하는 거야. 그게 바로 ‘소비에트 의료’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이 그 시작이었어. 민중이 들고일어나 부패하고 무능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사회주의 공화국을 탄생시켰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거친 뒤 1922년에 공화국은 가까운 나라들과 함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 일명 ‘소련’을 이루었어. 소비에트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를 뜻해. 혁명 과정에서 노동자와 군인이 만든 자치 조직인데, 이 말이 공화국을 대표하게 되었어.

신생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에는 부족한 게 많았어. 특히 의료시설은 없다시피 했어. 그래서 정부는 혁명 직후부터 나라 전체에 의료를 공급할 계획을 세웠어. 먼저 의과대학을 늘려 의사를 키우고 국가가 지정하는 곳에서 근무하게 했어. 공장, 집단 농장, 국영 농장마다 의무실을 두어 아픈 사람이 이용하기 쉽게 했어. 지역마다 단일 진료소, 종합진료소, 병원, 휴양소를 세워 질병의 중증도에 따라 적절히 이용하게 했어. 질병 예방을 중요시하고 도시든 시골이든 의사와 병원을 배치해 의료보장에 격차가 없게 했어. 비용은 전부 세금에서 충당하므로 의과대학 학생에게 학비를 받지 않았고 환자에게 의료도 무상이었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또 다른 나라에서 의료를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제도를 출발시켰어. 영국이었어. 웬일인가 싶지? 자본주의가 발달했고, 소련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어 보이는 나라에서 말이야. 사실 영국은 내부 불평등이 오랜 고민거리였어. 1928년에 인구의 1%가 개인 자산 전체의 57%를 차지할 만큼 불평등이 극심했던 거야.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부자가 있는 한편, 상당수 시민이 가난에 허덕이며 생존을 위협 당했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사회보장의 실태를 조사하고 필요한 방안을 내놓을 위원회를 꾸렸어. 방안은 1942년에 ‘베버리지 보고서’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어. 국가가 시민 모두에게 실업, 장애, 퇴직에 대비해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하고 무상 의료를 예방, 치료, 재활 전반에서 제공하라는 내용이었어. 보고서가 발간된 날, 그걸 사러 나온 시민이 1km가 넘게 줄을 섰고 3시간 만에 7만 부가 팔렸어. 그 뜨거운 지지를 발판으로 영국의 ‘국영의료(National Health Service)’가 시작되었어.

국영의료와 소비에트 의료는 구성이나 작동 방식에서 공통점이 많았어. 그건 사회 체제가 달라도 의료의 기본적인 역할이 같기 때문일 거야. 이에 더해, 무상 의료를 보장하고 의료 전반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데 두 나라가 공통되었기 때문일 거야.

19세기 최고의 발명품, 의료보장제도

국가가 시민의 생계를, 그중에서도 의료를 보장하는 보장제도가 19세기 최고의 발명품이 아닌가 싶어. 그 제도 발명에 앞선 단계는 ‘개인 삶에 국가가 져야 할 책임이 있다’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었어. 그 깨달음이 힘없는 계층에게 먼저 오고 권력층에는 나중에야 오는 것을 역사가 보여줘.

이제는 거의 모든 나라에 의료보장제도가 있어. 제도의 모양새는 나라마다 다르고, 또 사회의 변화와 함께 바뀌고 달라져. 21세기 한국인을 위한 의료보장제도는 어떠해야 할까? 생각해 보면 좋겠어. 앞으로 이와 관련해 도움이 될 이야기를 들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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