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트기 직전의 나무처럼 살기

2025-03-12

식욕이 가장 왕성할 때는 첫술을 뜰 때다. 곧 들어올 음식에 대한 기대로 배가 더 고파지고, 채 들어오지도 않은 음식 맛을 보느라 입속이 분주하다. 봄에 안달이 날 때도 그러하다. 봄을 목전에 두었을 때. 한겨울이 아니라 바로 지금. 바람은 여전히 차갑지만 그 기운이 사뭇 다르고, 나무들은 헐벗었지만 가지 끝 머금은 물기가 다르고. 머지않았다 꽃망울. 오는구나 봄. 올해 진달래·벚꽃 개화 시기는 어찌 되나 전국 지도를 살피며 봄나들이를 계획해 보다가, 화원에 들러 수선화나 히아신스 같은 꽃 화분을 들여와, 봄보다 먼저 킁킁 봄 내음을 맡아보는 것이다.

첫술 허기처럼 왕성한 소비욕

쓰레기는 만들지 말자 했는데

연필만 평생 쓰고 남을 분량

완전히 비워야 봄은 오는 것이니

아침 새소리에도 마음이 근질거리고 몸이 들썩거리는 걸 보면 봄은 봄. 오기 전에 먼저 찾아가 볼까 봄. 봄봄봄 거리며 여행을 다녀왔다. 혹시 산수유나 매화 같은 걸 볼 수 있으려나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는데, 하필이면 남쪽에서도 백두대간 수목원, 꽃길이 아니라 눈 쌓인 길이었고, 도착했을 때는 눈발까지 날렸다. 봄을 맞으러 간 것이 아니라 겨울을 연장하기 위해 도망친 듯했다. 봄의 목전에서 봄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 어쩐지 봄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 꽃은 보지 못하고 온전히 잎을 떨군 나무들과, 덕분에 환히 드러난 산세만 실컷 보고 돌아왔다.

허기가 졌다. 무언가 다른 일을 벌여야 할 것 같았다. 봄을 맞으려면 닦아야지 길. 봄맞이 길닦이로는 청소만한 게 없지. 봄맞이 대청소를 벌였다. 이른 감이 없지 않지만, 이불을 바꾸고 옷장 정리를 시작했다. 입었던 옷보다 입지 않은 옷들이 더 많았다. 몇 년째 나왔다 들어가기만 했던 옷들도. 내처 책장에도 손을 댔다. 두서없이 쌓여 있던 책들을 분류해 꽂는데, 역시나 읽지 않은 책들이 부지기수다. 사서 읽었는데 이미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한 것은 물론이고. 이왕 시작한 김에 모든 장과 문, 서랍을 열고 내용물을 뒤집어엎었다. 꺼내놓고 보니 물건들이 바닥 가득이다.

이 많은 연필은 다 어디에서 왔나. 필기감이 좋아 다스로 쟁여 두고 쓰고 있는 것부터, 박물관이나 미술관 전시관 여행지에서 하나씩 사 모은 것, 기념품 사은품 누군가 선물로 준 것, 호텔이나 기업 로고가 박힌 것, 빌려 쓰고는 돌려주지 않은 것, 하물며 다 쓴 몽당연필을 모아둔 상자도 있다. 하나하나 세어보니 백을 넘어 이백에 육박한다. 이걸 다 쓰고 죽으려면 얼마나 살아야 하나. 글 쓰는 데만 쓰라고 하면 도대체 얼마나 써 재껴야 하나. 다 쓰기 전에 머리 아파 죽고 말지.

딱 필요한 만큼의 소비와 생활. 적어도 쓰레기는 만들지 않는 삶을 살자 했다. 지구를 위해서라거나, 지구에서 좋은 생명체로 살아가기 위한 개인의 작은 실천이라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단정하고 군더더기 없는 삶을 원했을 뿐. 최소한의 삶. 어쩌다 보니 생활 패턴은 단순해졌는데, 소비에 관한 욕구는 매번 첫술을 뜰 때처럼 왕성하다. 지난주에 나는 그립감도 좋고 필기감도 딱 마음에 드는 볼펜을 직구로 구입했다. 배송비가 아까우므로 검정·파랑 색깔별로 한 다스씩. 구경하는 김에 마스킹 테이프도 하나 추가. 죽을 때까지 쓰고도 남을 연필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연필은 연필이고 볼펜은 볼펜이니 하면서.

비단 연필뿐인가. 이래저래 모아둔 수첩이나 노트는 어떻고. 거기다 일기를 쓰라 하면 또 백년을 더 살아야 할 거다. 에코백은 두 손가락을 다 꼽고도 모자를 만큼 넘쳐나는데, 돈 주고 구입한 쇼핑백은 그보다 많다.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텀블러와 리유저블 컵이 쌓여 있지만 여행길에 마신 커피 종이컵은 내가 가진 텀블러 수보다 많다. 한때 쓰다가 박아둔 각종 가전제품들이며 온갖 충전기와 전선 보조배터리 등등에 이게 뭔가 싶은 것들까지. 그저 가지고 있으려고 놔둔 저 많은 것들. 이것은 대체 무슨 허기란 말인가.

봄맞이 대청소를 하겠다고 다 끄집어내 보았더니, 온통 과다 잉여 수집과 망각의 산물들이다. 봄 맞으러 간다 조급히 떠난 여행길에서는 무엇을 보았나. 한겨울보다 더 황량해 보이던 나무들. 시리게 드러난 산세와 지형들. 아무리 그래도 태양이 이미 입춘을 넘어 경칩에 다다랐는데. 왜 그리 지독하게 맨몸뚱이였던 걸까.

청소를 마치고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을 열었다. 과연 바람이 한결 온화했다. 창으로 상체를 내밀어 가로수길을 눈으로 좇았다. 마른 이파리 한장 안 달고 매끈하게 빈 은행나무 가지들. 저토록 환히 빈 적이 있었던가. 그렇지. 마른 잎이 모두 사라지는 때가 바로 봄이지. 새순의 힘으로 죽은 잎을 떨구어내는 것이지. 그런 걸 바로 움튼다고 하는 것이지. 움트니까 봄인 것이지. 그러니까 봄소식은 꽃망울이 아니라 완전히 맨몸이 된 가지로부터 오는 것이지. 비워낸 저 몸이 바로 봄. 그러니 무슨 실천이니 명분이니를 떠나 봄처럼 살아보자. 움트기 직전의 나무처럼. 하루하루 봄을 만들면서.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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